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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랩소디인베를린_한청년과 옛청년이 가닿고자 했던 곳

by 쭈야해피 2019.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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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심동이다.

책을 두어권 더 읽었는데,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감상문을 놓쳐버렸다. 모두 다 게으름이 원인이겠다.

그래도 이 책은 넘겨버릴 수가 없어서 좌판을 두드려 본다.

 

 

책의 헤드카피는

조국에 닿지 못하고 떠돌다 간 두 조선인 음악가 민족과 국경을 허무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광시곡

구효서 작가님의 2010년 장편소설이다.

 

나는 이 책을 몇장 넘기자마자 이 이야기에 매료될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예술인들의 삶에 찬사를 보내고, 뼈아픈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고, 그 속에서 꽃피우는 사랑이야기에 가슴 벅차하니까... 비록 해피앤딩이 아닐지라도.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초반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아주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쉽지 않은 구성이었고 흐름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인물과 주변 인물을 가감없이 넘나드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어주고 묶어주는 뼈대가 있었다. 광시곡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가히 그 시절에 미치지 않고 미친듯이 끊임없이 자신을 내몰아쳐 음악을 해내야만 했던, 아니 음악이 아니었다면... 버텨낼 수 없었을 그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그 도시에 가고 싶어진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땐, 열차를 타고 리스본에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고, 빈에서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면 어떨까, 베를린에서 음악과 시를 짓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뉴욕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과 스카이라운지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과 만나는 수 많은 상상속에 그 도시를 여행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점차 자란다.

멀고 먼 저 먼 어딘가 신화처럼 전해진 이야기 속 동쪽나라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그곳을 그리워했던 18세기 농민 출신 음악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재일교포, 음악을 하고 싶어 찾은 독일에서 ... 한반도에 갈 희망의 끈을 찾아 평양에 그리고 서울에 갔던 한 남자.

나는 그들이 매일 같이 소멸하길 바랐을 거라고 감히 짐작한다. 음악을 할 때는 시공간이 사라지겠지만, 그래서 감격하고 행복했겠지만, 삶은 그렇게 늘 기쁘고 감격스러운 건 아니니까. 발을 어떤 나라 어떤 장소 어떤 집과 공간에 디디고 살아야 하는 거니까.

내가 사는 곳은 이곳이고 나를 지켜주는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내가 하는 일은 '음악'이야 라는 존재의 정립이 ... 존재의 이유가 ... 좀 더 확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냥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고통과 몸부림과 집념과 사랑과 노력이 무언가 '음악'이든 뭐든 그런 것을 낳는다. 그 뒤에는 변하지 않을 끝끝내 내가 가서 머무를 수 있는 단단한 안식처가 필요하다.

그것이 없던 두 청년은 18세기에도 21세기에도 그것 그곳 그 사람을 찾아 헤매일 수 밖에 없었을 테지...

날마다 날마다 이대로 나의 존재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 혹은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 하루하루 버텼을 게 분명한 소설 속 그들의 삶이 가슴저렸다.

 

프롤로그

pg. 28

 '아, 이것은 모질지 못한 짓일까 모진 짓일까. 내가 늘 찾던, 내가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이 하나코였다는 사실을 못내 고백하는 것.'

 

1.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

pg. 33

하나코, 겐타로, 모두 67세. 주위에 더러 죽는 친구가 생기는 나이였다. 그의 부고는 사태였다. 맑은 날, 집의 옆구리를 뚫고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온 그 무엇.

pg. 45 - TNF

다만...... 모든 음악이 시도 때도 없이 사무쳤을 뿐입니다. 평생 풀무꾼으로 늙어 죽는대도 영고아이라 여겼습니다만, 과욕과 오만에 무지칸트의 말들을 낱낱이 훔쳐 들었고 감히 많은 칸토르와 오르가니스트와 카펠마이스터의 음악을 주제넘게 흠모했습니다. 몰래 오르간실에 드나드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2. 삶이여 헐벗으라

pg. 73

겐타로 집은 그곳에 있었다. 전화번호도 40년 전 그대로였다. 너무 가까이, 확고하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안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정말 안 그럴 이유도 없었다. 확인을 안 했고, 무심했을 뿐이다. 분명한 건 그거였다. 확인을 안 했고 무심했다는 것. 겐타로는 줄곧 그녀 곁에, 그렇게 있어 왔던 것이다. 부끄러움과 자책감에 치여 비틀거렸다.

pg. 83 - TNF

나리와 제가 끝까지 지킬 것은...... 비밀이군요.

비밀? 아이블링거가 조금 웃었다. 말하자면...... 그렇지. 비밀이야.

음악 곁에 살면서 비밀을 지키는 일. 어느 한쪽만을 택할 수도, 모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미 그리 되었다. 힌터마이어는 무엇보다 빈 건반이라도 만지는 일을, 악기 냄새 맡는 일을, 종일 음악 들리는 천국 같은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키르케와 풀무꾼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일이라는 것. 어찌 보면 그처럼 쉬운 일은 없었다.

 

3. 먼셀 표색계 5P 3/10

pg. 113

"내게 박힌 오늘의 색깔들. 또 다른 섭리가 아니고선 나 스스로 빼거나 지울 수 없어. 내가 나를 느껴. 내 의지로도 네 의지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느닷없고 일방적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이미 짙게 물들었다는 것도 아는 걸." 겐타로 말끝이 조금 젖었다.

pg. 116

완벽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하나코와 겐타로는 자신들의 보라색을 지칭하는 기호를 찾아냈다. 먼셀이라는 사람이 개발한 색상배열체계였다. 하나코와 켄타로는 동시에 한 색깔을 짚었다. 5P 3/10.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보라색은 두 사람의 머릿속에, 언제나, 기호 5P 3/10 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pg. 122 -TNF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아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힌터마이어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곳에 자두가 있었다. 힌터마이어의 포크가 놓인 흰 자기접시 위에, 핏빛 자두 한 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디향이 났다. 힌터마이어는 그 순간을, 그 뒤로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평생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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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배초향 피었던 자리

pg. 138

멕바흐 씨는, 그렇다는 걸 알았다. 그가 토마스를 오해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토마스는 얼른 말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게 그다운 거였다. 멕바흐 씨는 캐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표정 짓지 않을 때 더 정확한 감정이 읽힌다는 걸 알았다.

pg. 144

멕바흐 씨는 일부러, 음악에 국한해 반응했다. 설렘의 이유가 분명해졌다. 태어나 처음 방문하는 서울이었다. 평양도 그랬었다. 음악 아닌 조국. 설렘의 까닭은 그거였다. 토마스를 바라보며 다시 쓸쓸해지는 이유를, 멕바흐 씨는 알았다.

"그 뒤로 그를 볼 수 없었다오. 적어도 17년 동안은." 멕바흐 씨는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pg. 145

 '늘 무언가를 향하면서 그곳에 닿지 못하는 사람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중얼거린 게 멕바흐 씨인지 하나코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5. 그런 애였니?

pg. 181

슈트릭커는 성악가였네. 그런데도 대작 <영웅에 대한 아름다운 승리>를 작곡하지 않았는가. 제가 작곡을 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지. 자네 곡이라면 내가 연주도 하고 지휘도 하겠네. 상상해 보게. 자네 곡이 빌헬름부르크에 울려 퍼지는 걸세.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득하고 아득하면서도, 힌터마이어 몸은 마구 떨렸다. 찬란한 미래에 대한 성급하고 막연한 꿈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괴이쩍은 전율이 힌터마이어 뼈마디를 흔들었다.

pg. 191

"비밀이야." "비밀?" "신분. 그 비밀은 새나가면 안 되니까. 나는 말이야......." "보물 같은 거 없구나" "어쩜...... 너는." "숨겨 놓은 보물 없는 사람이 부자고 자유롭고 행복하대." "한 가지 약속해 줄 수 있어?" 하나코가 물었다. 겐타로가 말했다. "좋은 친구 돼달라는 약속이라면." "너한테 졌다." 하나코가 말했다. "친구가 되어줘."

 

7. 빛이 내게로

pg. 229

아버지에겐 당초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던 까닭도 나중에 스스로 알게 됐다. 그냥 그러는 거란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라쿠민카오쿠. 그렇게 불리지 않은 게 아버지에겐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남들보다 한술 더 떠 죠센가오쿠라 말했던 아버지의 속내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8. 알비노니 아다지오

pg. 251

슈타인도르프가 펼쳐준 곳에 <랩소디 인 베를린>이라는 제목과 그의 이름이 보였다. "책장의 저 원고들이 많아 보이오?" 그가 말했다. "내 글의 문장 수가 폴란드 절멸 수용소 신발 수만큼 되려면 아직 멀었지." "신발......." 부헨발트 기념관을 다녀온 하나코였다.

pg. 264

바이올린은 까무룩 사라지다 돌아오고, 돌아와 휘몰아치다 다시 멀어져 갔다. 풀밭 위에 누워 하나코는 빙빙 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렸다. 등지고 누운 땅도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범선 갑판 위에 하나코는 누워 있었다. 아득한 대양 해수면 위를, 산이, 통째로 미끄러져 갔다.

어머니는 죽기 전, 슬퍼하는 어린 하나코에게 말했다. -목적이 있어 사람이 태어나는 건 아니란다. 다음 말을 잇기 위한 거였다. -까닭이 있어 죽는 것도 아니지. 하나코는 어머니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딸을 위로하는 거라 여겼다. -그러니 너는....... 어머니가 침을 삼켰다. 앙상한 울대뼈만 간신히, 미세하게 움직였다. -살고 싶은 대로 살거라. 어떻게 하는 게 살고 시은 대로 사는 건지 하나코가 알 리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하지 마라. 그러겠다고, 하나코는 약속했다.

 

9. 벌거벗은 생명 1

pg. 326

진술자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속에서 무언가 비집고 올라오려는 순간 격정이 먼저 진술자의 목을 막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시도했다. 번번이 목이 메었다.

"다시 해볼게요. 다시 해볼게요......." 진술자는 안간힘을 썼다. 침을 삼키고, 숨을 고르고, 멋쩍게 웃기도 했다. 음음음음....... 허밍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가사가 스며 나오려는 순간 허밍은 가늘게 떨리며 힘없이 끊어졌다. 음음음음음....... 시도는 반복되었고, 거듭 실패했다. 매번 흐느낌이 먼저 나와 가사를 막았다. 음음음음음....... 음음음음음음...... 음음음음음음....... 음음음음음음....... 필자는 끝내 가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술자의 허밍을 멈추게도 할 수 없었다. 필자는 이 세상 어떤 땅 위에든 32막사가 다시 세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10. 벌거벗은 생명2

pg. 358

"멘, 이니까. 토마스는 토해야 했으니까. 평양에서도 서울에서도, 일본과 독일에서도, 그러니까 아무데서도, 그는 말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토하게 해야 했지. 나는 그걸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지 않겠소." "자꾸 묻는다는 건 아픔을 건드린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말하지 않으면 아픔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아요. 말한다고 해서 아픔이 없어질 순 없겠지만, 견디게 할 순 있지." "견디게......."

 

pg. 372

-남겼어야 하는데, 2차장이 못 참은 거지. 자기도 뭔가를 보여줘야 하잖아. 1차장 독식하는 꼴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거야. 동백림 때도 1차장 혼자 크게 먹었잖아. -쟤만 불쌍하지.

두 차장 사이의 견제와 경쟁의 희생자. 겐타로는 자신이 잡혀 온 연유를 짐작했다. 이미 박쥐의 청신경을 갖게 된 겐타로. 참혹한 환경에서 감각은 하릴없이 진화했다. 겐타로가 잡혀온 건 범죄 때문이 아니었다. 공명심 다투는 정보기관 책임부서장들 간의 시기. 겐타로의 행적은 애당초 날조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겐타로는 납치와 고문의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pg. 375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끔직한 농담, 푸른 칼로 영혼을 난자 당하는 아픔, 뇌수가 뭉개지는 혼돈이었다. 아이의 서툰 손에 쥐어진, 활 아닌 창이, 어두운 허공을 무지막지하게 휘저었다.

베토벤의 <기쁨의 노래>라니. 바그너의 <결혼행진곡>, 브람스의 <왈츠>라니. 하필 모두 독일인의 것이며 하나같이 겐타로가 외웠던 곡이라니. 정교하고 야비한 살해, 다시 일어나 땅 딛지 못할 치명적 일격이었다. 야물지 않은 손으로 떨며 떨며 현을 짚던 어린 시절 겐타로의 꿈들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pg. 380

실오라기 같은 희망 따위 가질 수 없었다. 갖기 싫었다. 어떠한 의지도 무망하고 불필요했다. 그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는 것, 가능성을 제로로 끌어내리는 것만이 겐타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좌저롸 절망. 그것은 저들에 의해 초래되고 당할 바가 아니라, 겐타로 스스로 선택하고 고수해야할 것이었다. 겐타로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감이란 그런 거였다. 기대와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체념해 버리는 것. 탁자나 박제 같은 무기물이 되어버리는 것.

 

13. Das ist mein

pg. 425

"...... 내 것이야." 하나코 아버지는 말을 마쳤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따위 부가 의문은 필요 없다는 듯. 입술마저 언 토마스는 아무 말 못했다. 설마, 라며 의식 저편으로 자꾸 밀쳐 두었던 의문.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 대답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아득히 무너져버릴 것 같아 꾹 다물었던 입이었다.

pg. 429

"모르는 걸, 백 년이 간다고 알 수 있을까요.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죠. 이렇게 알게 되기 전까지는......." 책망의 기운을 알아차렸던 걸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하나코가 말했다.

pg. 435

청중의 기대를 배반하는 즉흥 완급, 박자를 벗어나는 낯선 타건, 넘어질 듯 간신히 일어나는 음의 고저가, 벡크만이 이루어놓았던 믿음과 위로의 분위기를 거두어갔다. 의문과 놀람, 불온하고 아연한 기운이 회중석을 감돌았다. 키제베터와 레아도 마음을 졸였다.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꺼림칙한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외려 아이블링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14. D장조 콘체르트

pg. 445

 "두려움에 의연히 맞서는 숭고한 품성 없이는, 죽음 앞에서 삶을 붙잡을 수 없어. 두려움을 거두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숭고하긴 마찬가지. 한쪽을 응원할 뿐 다른 한쪽을 야유하지 않는 이유."

pg. 456

 "TNF. 이 친구가 떠듬떠듬 읽어주고 있지. 요한 힌터마이어의 <토카타 운트 푸가>." "그랬군. 토마스는 그걸 보러 평양엘 갔고, 그 때문에 한국에서 죽다 살아났지. 죽다 살아난 거야. 베를린으로 돌아온 뒤 그는 조국도 민족도 결국 말일 뿐이라며 음악에 전념했소. 예술가로서 자신에게 남은 조국은 이제, 음악, 그것뿐이라며. 멋진 말이었지. 정말 많은 곡을 열심히 만들었소. 실은 미친듯이었지." "그러던 그가 죽었어요." 하나코가 말했다. "그랬소. 오랫동안 처박아 놓았던 TNF를, 죽기 전 얼마동안 몰래 꺼내 읽었지."

pg. 467

여섯 개 묘지의 묘석 어디에도 우리가 찾는 이름은 없었다. 김상호도, 야마가와 겐타로도, 토마스 김도 보이지 않았다. 생몰연대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번에 그의 묘지를 찾았다. '내가 평생 가닿고자 했던 곳.' 정도의 명문(銘文)쯤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내 예상도 빗나갔다. 거기엔 어느 나라 말도 없었다. 하나코라야 그 뜻을 대번에 알아차릴, 암호 같이 짧은 기호가 침묵처럼 버티고 있었다. 5P 3/10 하나코는 그 앞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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