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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_최근 읽은 최고의 작품

by 쭈야해피 2019.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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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보고 구매한 책이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작가라고 칭송 받는다고 하는데, 무려 12년간 이 작품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왜 그렇게들 극찬을 보내는지 알게되었다.

사실 나는, 맨부커상이라는 문학상도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2년에 한 번씩 선정하는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면서 알게 되었다.(-부끄럽지만 그 전에는 노벨문학상 밖에 몰랐다) 영국 소설도 잘 모르고, 호주 소설이라고 하면 호주 출신의 마커스 주삭 <책도둑> 정도만 읽은 게 전부다. (기억나는 게 없음 ㅠㅠ) 그래서 이책을 읽는 중에는 '전쟁소설이라서 칭송받나? 음 .. 잘 알기 힘든 내용이기는 하네' 정도였는데..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완전 깜놀하였다. 소설은 대서사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12년이 걸려야 이런 소설이 나오는 군아. 이야기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다 녹아 있구나.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하면서 .. 자꾸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ㅠㅠ

(나는 안 될 거 같은데.. 이쯤에서 글쓰는 것을 포기해야하나. ㅠㅠ 엉엉엉...)

 

아무튼 최근 수년간 읽은 책중에 단연 최고임을 자랑한다. 대단하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감상평을 더 쓸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요즘 죽음과 삶. 상실과 허상. 진실과 거짓. 이기심과 이타심. 삶을 지키는 힘. 뭐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니 절대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계속 떠올라서 화가난다. 화가 나는 단계를 넘어 그런 생각이 몰려오면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알 수 없는 답변들이 주르륵 나열되기 때문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른 이들의 인생을 들을 때(그거 알려나? 예능을 보면서도 같은 감정을 느낄때도 많다) 가장 감사하다. 아무튼 그런 심신상태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생각들과 개념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저번에 알.쓸.신.잡에서 히틀러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유대인들과 포로들을 학살한 것은 상부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 예능프로그램을 보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그런 변명을 했다는 것도 몰랐을뻔 했다. ;;) 아무튼 같은 맥락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정말 말도 안되는 지시와 복종, 살인과 방관, 그 이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삶, 아니 삶을 가장한 버팀... 그리고 잊혀질 권리 등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보통의 상식과 이성을 벗어나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 그렇기에 '누구를 가해자이다 피해자이다' 라고 단정하는 것이 어쩌면 굉장히 모순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책을 읽고 난 나의 사견이고, 독자로서 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분명한 가해자, 피해자, 나쁜놈, 불쌍한 놈, 이기적인 놈, 비열한 놈 등의 자기판단을 이입한채 보았다.

 

그리고 조선인 일본장교에게는 과하게 감정이입하였는데, '이런 나쁜 놈들..' 하면서 끝까지 읽고 약소국이라는 것에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결국에 최대의 피해자는 조선인들 그리고 힘없는 놈들 뿐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돈 벌려고 그랬다고? 그래 돈 벌려고 가족을 지키려고 가족만 아니었으면 도망을 치든 자결을 하든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별별 상상들을 하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이야기 가장 최후에 생각한 것은(스포일러 있음 주의!), 잊지도 잊혀지지도 않을 그 지옥의 지붕 위를 걸었던 그 삶의 일부분이,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집어삼켜 사는 것도, 살지 않는 것도 아닌 삶을 살아야만 했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와 그의 아내 엘라. 휘청거리는 도리고의 삶도, 그런 그의 껍데기와 평생을 함께 한 엘라의 삶도, 결국은 엘라의 단 한 번의 거짓말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도리고는 가짜 가면을 쓴 자신의 현재의 삶을 선택하면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거짓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건 어쩌면 최고의 핑계, 누구에게라도 필요했던 이유였을지도.

 

아빠가 생각났다. 돈을 벌기 위해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던 아빠. 전쟁의 지독한 참상을 실제 겪었으면서도 가난때문에 다시 전쟁터로 직접 뛰어든 청년. 아빠는 술을 많이 드신다. 아빠는 술이 약이라고 하셨다. 이 이야기속에 살아남은 전쟁포로였자, 전쟁영웅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로서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간신히 .. 죽은자들을 대신해, 아니 끝까지 살아난 자신들의 선택에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이제는 녹슬고 찌글어지고 형편없는 옛날 이야기로 치부되는 그 전쟁이야기 속... 옛날이야기들이 아직도 여전히 오늘밤 꿈에도 나타나 죽음을 맞이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잊혀질 수 없는 고통의 단어로 내뱉어지고야 만다.

 

전쟁은 어떤 나라의 잘못과 어떤 나라의 이익이 부딪혀 생겨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전쟁을 겪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생지옥을 경험한 것이며, 끝나지 않는 지옥을 걷게 만드는 것임에 분명하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불안을 야기시키는 그 어떤 세력도 용서받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이웃, 친구, 가족, 사회의 인생전체를 송두리째 빼앗고 짓밟는 일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만든 이야기였다.

 

벌 한 마리 모란에서 비틀비틀 나온다 - 바쇼

pg. 14

재키 매과이어가 에번스 일가의 작고 어두운 부엌에 앉아 울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아기들을 빼고는. 하지만 재키 매과이어는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아마도 마흔 살쯤, 어쩌면 그보다 더 위. 그런 그가 손등으로 곰보 자국이 있는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아니, 손등이 아니라 손가락이었나?  도리고 에번스의 기억 속에서 확실한 것은 그가 울었다는 사실뿐이었다. ... ...

그의 나이는 아홉살. 엄지에 피가 몰려 생긴 물집을 어머니에게 보여주려고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남자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것은 전에 딱 한 번 뿐이었는데, 형 톰이 프랑스에서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기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pg. 31

다키. 그는 그녀의 등을 향해 속삭였다. 마치 뻔히 알지 않느냐는 듯이. 하지만 뻔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가디너. 말을 하는 동안 그의 아랫입술이 그녀의 살갗에 닿았다. 그 친구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당신 얼굴과는 달랐겠죠. 그녀가 말했다. 그건 무의미한 말이라고 도리고 에번스는 생각했다. 다키 가디너의 죽음에는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분명하고 단순한 사실을 왜 글로 쓸 수 없는지, 다키 가디너의 얼굴이 왜 보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pg. 55

여긴 씨발 오스트레일리아의 씨발 동쪽도 아니야. 잭 레인보우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은둔생활을 하는 종교인 같았지만, 혀는 부두노동자 같았다. 하지만 실제 직업은 홉을 재배하는 농부였다. 여긴 북쪽이야. 그가 말했다. 그러니 다음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모를 수밖에. 아예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씨발, 멀고 먼 북쪽이라고.

 

pg. 56

도리고 에번스는 아직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다키 가디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토끼 헨드릭스가 먼지투성이 치아 두개를 입안으로 다시 밀어넣고 있었다. 얘비 버로스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 ... 그날 늦게야 그들은 얘비 버르사 가져온 뜨거운 상자에 들어 있던 포리지를 먹었다. 이미 다 식어버린 포리지를 먹으며 아무도 수탉 맥니스 옆에 안지 않았다.

 

pg. 75

두사람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또다른 의무가 되어버렸다. 하기야 지금 그의 인생은 온통 의무 천지였다. 아내에 대한 의무. 자식들에 대한 의무. 일과 위원회와 자선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 리넷에 대한 의무.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의무. 진이 빠졌다. 이런 의무들을 수행하려면 체력이 필요했다. 때로는 그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업적을 누가 인정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의무들을 전부 수행하는 데에는 묘한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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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그 여자에게서 어스름이 쏟아져나와 저녁 파도를 가로지른다 - 잇사

pg. 88

하지만 사람들 무리는 새떼나 물고기떼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멈춰서더니 그 서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모였다. 도리고는 그중 몇 명이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더욱더 열심히 책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든 뒤에야 그는 사람들이 왜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빨간 꽃을 꽂은 여자가 그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와, 어둠과 빛의 줄무늬 속에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pg. 154

그럴 때면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갈망이 그녀의 위장을 갉아먹고, 가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름도 없는 그 무시무시한 갈망이 자기 인생의 핵심이 되어버릴까봐 두려웠다.

 

pg. 161

단순히 철로만 중요한 게 아니야. 고타 대령이 말했다. 물론 철로는 반드시 건설해야 하지만. 전쟁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쟁도 반드시 익야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자신이 우월한 인종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카무라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우월한 인종이라는 걸 배워야지. 고타 대령이 말했다.

 

pg. 168

에이미는 자신이 지금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도리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키스가 마음속의 진심을 그녀에게 한 번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든 말이 가면이었다. 그녀는 키스가 진짜 이야기를 해주기를 정말 바란다고 도리고에게 말하고 싶었다. 단 한 가지라도 좋으니 진짜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고.

 

pg. 171

에이미는 물이 자신을 온전하고 강한 존재로 바꿔놓는 것 같았다. 어제만 해도 자신의 중심에 있는 것 같던 일들이 흐물흐물 녹아서 하찮은 일로 변하더니 완전히 쓸려가버렸다. 다음주 식당 메뉴, 호텔 방에 비치할 새 모직 담요 확보의 어려움, 바텐더의 몸에서 나는 냄새, 키스가 저녁때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이면서 내는 역겨운 소리 등에 대한 고민들.

 

pg. 182

어쩌면 난 우리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다시 임신을 해서 이번에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모두 틀린 생각이었어요. 나는 친절한 그 사람이 싫었어요. 내가 계속 미워했더니 결국 그 사람도 날 미워하게 됐죠. 나더러 자길 속여서 결혼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처럼 보여요. 그 사람은 내가 자기를 속였고, 끔찍한 짓들을 해서 임신했다고 말했어요. 지금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이 그냥 말로 끝나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 사람이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문장에 모두 드러날 때가 있잖아요. 단 한 문장에. 넌 날 속였어. 그래서 결혼한 거야.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런 의마가 없다가, 단 한문장이 모든 걸 의미하게 된 거예요.

 

pg. 214

도리고는 에이미를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자신이 가서 제대로 할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자신이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어디든 전쟁이 이끄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pg. 222

그가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걸레를 놓아버리고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이처럼 바닥에서 몸을 웅크렸다. 발로 타일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 존재한테나 기도를 드리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죽었고 그녀는 세상이 기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었다. 그녀의 힘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떠난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해도, 그녀의 힘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슬의 세계 모든 이슬방울 안에는 투쟁의 세계 - 잇사

pg. 296

여기에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지. 도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 또한 동정심의 뒤틀린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곧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뜻했다. 그래도 살아야지.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pg. 312

나는 하느님한테 아무런 이의가 없다. 도리고 에번스는 보녹스 베이커와 함께 장작을 밀고 쑤셔서 시체들이 불길에 골고루 감싸이게 하며 말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도 귀찮아. 내가 지긋지긋하게 싫은 건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이런 식으로 끝을 내는 게. 이런 식이라니요? 하느님 방식. 하느님이 이랬네 하느님이 저랬네 하는 것.

사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씨발 놈의 하느님이었다. 이런 세상을 만든 씨발 놈의 하느님. 그 씨발 놈의 이름. 앞으로도 영원히 씨발. 평생 동안 씨발 놈. 우리를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여기를 돌아보지 않고, 저 씨발 놈의 대나무 위에서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지 않은 씨발 놈.

 

pg. 349

큰형님? 잭?  제가 죽는 건가요?  그럴 것 같다.  추워요. 그가 말했다. 미치게 추워요.

도리고 에번스는 계속 꾸준히 잭의 상처를 봉합하려고 애썼다. 대나무로 만든 임시 수술대 아래에서 그의 맨발은 피투성이 진흙 속에 발목까지 잠겨 있었다. 차분해 보이는 겉모습은, 속이 가장 들끓고 있을 때 그가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기묘한 버릇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pg. 351

무슨 말을 하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맞장구를 치는 것, 공사가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엄청나게 짜증스러웠다. 고타 대령은 그가 늘어놓는 모든 찬사 뒤에는 경멸이, 그에게 동조하는 모든 말 뒤에는 조롱이, 모든 자랑 뒤에는 건방진 우월감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못해도 저 조선인 부사관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잘하면 그의 심사를 건드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아무 이유 없이 포로들의 인원 점검을 지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로의 수가 아홉 명이 모자랐다. 포로 아홉 명이 사라진 것이다.

 

pg. 363

그 순간 그는 나카무라의 무서운 의지에 감탄했다. 매질을 당하는 다키 가디너 때문에 절망하는 것보다 더 감탄했다. 그 음산한 힘, 의심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고 명예를 위해 올곧게 복종하는 태도. 도리고 에번스는 거기에 도전할 수 있는 생기를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나카무라가 금욕주의자인 것처럼 낡은 옷을 입고 굳은 얼굴로 고아나를 후려치는 모습, 방금 커다란 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이제 도리고 에번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날 밤 함께 카드놀이를 했던 인간 장교였다. 오늘 아침에 사람들의 목숨을 놓고 그와 거래를 했던, 냉혹하지만 실용적인 지휘자가 아니라 개인과 집단과 국가를 휘어잡아 그들의 본성과 판단력을 거슬러가며 휘고 뒤틀어서 무심한 숙명론으로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무서운 힘이었다.

 

pg. 365

도리고는 가장 먼저 박자를 맞췄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한 일이 거의 없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의한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됐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산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일 뿐, 그래도 - 잇사

 

pg. 405

그는 맬버른을 통과하는 배편으로 마침내 프리맨틀에 도착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데이브와 메이지의 집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했다. 저는 데이브이고요.

도마뱀 브랜쿠시는 전화를 끊었다. 배가 증기를 내뿜으며 프리맨틀을 떠난 날 밤에 그가 뱃전 뒤로 넘어가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그뒤로 그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갑자기 맥주가 불을 붙이는 연료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의 기분이 되려고 술을 마셨다. 전쟁 전 술을 마시지 않던 시절의 기분이 되려고. 그날 밤 그들은 사나우면서도 온전했지만, 아직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은 모든 일에 대해 웃음을 떠뜨렸다. 그렇게 웃을 때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고,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은 몸속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그것일 뿐이었다. 그것이 워낙 강하게 펄떡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 느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또 재빨리 술을 마셔야 했다.

 

pg. 413

자녀 분들이 있습니까? 지미 비글로가 물었다.

딸이 셋이오. 노인이 대답했다. 착한 아이들이지. 착한 가족들이야. 아들도 하나 있소. 착한 아들. 착한......

노인은 잠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의 얼굴이 휘청거리며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는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을 얼굴까지 들어올렸다. 가을날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치기를 한 늙은 살구나무 같은 손이었다. 그 손으로 얼굴을 떠받쳐 다시 자신 있는 표정을 만들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 녀석은 1943년 뉴기니에서 죽었소. 노인이 말했다. 부건빌섬에서.

 

pg. 426

열다섯 살 때 그는 일본인들이 제국 내의 다른 지역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일할 사람들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봉급은 매달 50엔이었다. 열세 살이던 여동생은 일본인들에게 비슷한 돈을 받고 정신대가 되어 만주국으로 갔다. 병원에서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될 거라며 몹시 기뻐했다. 동생은 글을 전혀 몰랐으므로, 그는 그뒤로 동생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지금은 동생처럼 떠난 여자들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는 동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도 생각이 날 때는 동생 자신을 위해서라도 동생이 이미 죽었기를 바랐다.

 

pg. 437

미국은 우리의 생물학전 연구에 관심이 있습니다.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우리는 그런 무기들을 중국인에게 시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걸 조선인에게 쓰고 싶어해요. 교수형을 당하는 건 운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뿐입니다. 아니면 조선인이거나. 미국은 이제 우리와 거래를 원해요.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입니다. 나카무라가 말했다. 사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카무라는 일본 민족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억울하게 비난받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그래, 피해자였다. 자신도, 이코쿠도, 처형당한 그의 동료들도, 일본자체도. 이런 감정은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옥의 지붕을 걷는다, 꽃을 응시하면서 - 잇사

pg. 484

그는 세 자녀(제시카, 메리, 스튜어트)에게서 멀어질수록 그들을 더 깊이 사랑했다. 그가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는 선량한 방임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과 엘라의 관계가 재연될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아이들이 서로에게 내보이는 적의와 차가움을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파서 그런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pg. 489

예전에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키스 멀베이니의 냄새였다.

그렇게 그와 엘라 사이에 경험이라는 공모가 자라났다. 아이들을 기르는 것, 현실적이고도 다정하게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것, 함께 보낸 세월, 수십 년 동안 쌓인 두 사람만의 대화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소한 일들, 그러니까 잠에서 깨었을 때 서로에서 느껴지는 체취와 아이가 아플 때 상대의 떨리는 숨소리, 서로가 앓은 병, 슬픔과 관심, 서로 기대하지도 않고 말해본 적도 없는 애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더 확시랗며 더 강하게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  같았다.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엘라에게 묶여 있었다.

 

pg. 503

하지만 태초에 있는 것은 빛뿐이다.

뭔가 말을 하려던 그는 그녀와 자신이 한마디 말도 없이 지나쳐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 앞만 바라보며 그늘 속을 걸었다. 그가 잘못 생각했다. 그녀, 그, 그들, 사랑, 특히 사랑을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세월도 잘못 생각했다.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했다. 그녀의 죽음, 그의 삶, 그들, 모든 것, 모든 것이 틀렸다. 그가 저지른 실수의 무게가 너무나 크고 너무나 압도적이라서 그는 맞서 싸울 수 없었다. 돌아서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뛰어갈 수 없었다. 다리 끝에 다다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pg. 523

뒷좌석의 세 아이는 검댕을 잔뜩 묻힌 채 조용히 앉아서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방부제 냄새, 바람과 불길의 포효, 거칠게 흔들리는 차, 열기, 난도질된 고기처럼 생살이 드러난 감정,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며 함게 살아온 두 사람의 고통과 절망,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 애정과 질병과 비극과 농담과 수고로 이루어진 음모, 결혼생활, 기묘하고 무서운 인간 존재의 한없음.

가족.

 

pg. 543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마지막 몇 장을 뜯어 화장지로 쓰거나 담배를 말아 피운 모양이었다. 희망도 기쁨도 이해도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없었다. 그의 인생이라는 책이 그대로 끊어져버렸다. 그의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그는 평화도 희망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도리고 에번스는 사랑이야기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그는 지옥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사랑 또한 지옥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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