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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언젠가, 아마도_여행지에서 만난 김연수 작가의 여행에세이

by 쭈야해피 2019.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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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님의 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것. 그게 김연수 작가의 여행이라는 것.

아주 명쾌하고 이해가능한 한줄 요약이다.

 

나는 지금 장기여행을 떠나와 있다. 아마 이번생에 이렇게 먼 곳에 이렇게 오랜기간 머무르며 여행을 떠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사람 일이란 뭐든지 장담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장기(7주 간) 여행이 나에게는 더이상 이상(理想)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을 멀리 떠나는 일도, 무언가 새로운 환경을 기대하는 일도, 이제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10년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6년 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으며, 오늘 이렇게 여기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스페인에 와있다. 뭐든지 해보지 않으면 간절히 바라게 되지만, 뭐든지 해보고 나면 '에이, 별거 아니네..' 가 되어버리고 만다.

 

나는 여행이든 일이든 만남이든 이별이든 어떤 것에든 그렇게 쉽게 좌절하고 지치고 마는 사람인 것 같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얼마나 별볼일 없고 얼마나 나약하고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존재인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인정이다.

 

<언젠가, 아마도>를 읽다보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느꼈던 감정과 바라보았던 풍경과 담으려했던 그곳의 사람들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라고 한다면, 소설가들이 낯선 땅에 가면, 어디 멀리 나가지 않고 그 앞에서 낮부터 밤까지 술을 마신다는 것과 별별 핑계를 다 대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 어쩜 그렇게 지금 나의 심정과 꼭 같을까.. 라는 생각. :")

작년에 선물 받은 이 책을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다 읽었지만, 그곳 서울에서 다 읽었다면, 과연 나는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이라는 것도 글이라는 것도 사람의 감정과 만남과 이별이라는 것도 다.. 그때 그때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꼭 그렇다. 여행지에서 읽는 여행 산문집은 굉장히 공감을 얻는 것이면서도 굉장히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떠날 곳을 동경하고, 누군가는 떠나 온 곳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산다.

언젠가, 아마도 .. 그곳으로 떠났던 그 시절 나를 애뜻하게 생각해 줄 날도 오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도 .. 나 스스로를 냉정하게 보게 된다.

'넌 도대체가 뭐가 문제냐' .. 문제랄 것도 없지, 사실은 그냥 누군가와 어떤 상황과 비교했을 때만 발생되는 거니까.

나는 지금 homesickness에 걸린 그냥 아~주 예민한 이방인일 뿐이다. 내가 달라진 것도 상황이 나빠진 것도 이곳이 그곳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 그저 힘이 빠져 지친 아주 나약한 한 사람일 뿐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여행이라는 것.

 

여행의 낙수, 반쯤 남은 생수

pg. 5 

여행자라는 약한 존재가 되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람의 선의에 기대는 법을 익히게 됐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는 근처에 있는 호텔을 찾아가는 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 동네 주민에게는 산책만큼 쉽다. 그러므로 그 여행자에게 필요한 행운은 단 한 사람, 그 호텔의 위치를 아는 현지인을 만나는 일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대단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다.

서로가 약간의 용의를 내기만 하면 된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용의, 선뜻 도와주겠다는 용의. 여행지의 행운이란 이런 두 사람이 만날 때 일어나는 불꽃 같은 것이다.

 

오르골의 법칙, 도루묵의 법칙

pg. 27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이건 오르골의 법칙이다. 이걸 뒤집으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건 도루묵의 법칙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마치 낯선 여행지처럼 느껴질 때가 몇 번 있었다. 나 혼자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이별했을 때, 이제 다시는 누군가와 웃으며 그 거리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돌이켜보면 바로 그때가 도루묵의 법칙이 작용했을때였다. 쉽게 구할 수없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인생이란 어쩐지 낭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단. 독. 여행

pg. 43

하지만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리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혼자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박물관과 미술관, 성과 대성당을 둘러봤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홀로 여행하는 일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빵을 먹던 나는 스트레인저(stranger)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건 어떤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단독자를 뜻한다는 것을 단(單)과 독(獨), 때로 여행은 그 단어의 뜻을 체험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지구가 하나 뿐이라 다행이야

pg. 224

말하자면, 본래 지구는 외롭지 않다. 하지만 그런 지구가 문득 외로워질 때가 있으니 그건 내가 여행할 때다. 여행지에서는 언제나 '론리플래닛'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여행이란 본디 외로워지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다.  .. 외롭지 않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다.

폴 서루의 책을 펼쳤더니 이런 문장이 나왔다.

 모든 여행자는 늙은 여자, 이제는 쭈글쭈글해진 미녀와도 같다.

낯선 나라는 이방인을 유혹한 뒤 차버리고 조롱한다. 이방인의 일요일은 지옥과도 같다.

... .. 지구는 외로운 별이 분명했다. 그 순간, 지구라도 외롭지 않다면 내가 너무 외로울 테니까.

 

사진으로 다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들

pg. 234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 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 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 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pg. 256

나는 여행자가 된다. 히말라야나 남극이나 아마존으로 간다면, 나는 이전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럼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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