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다가 덮기, 덮은 책 다시 펴서 들여다보다가 다시 포기하기. (간신히 한장씩 한장씩 넘기기)
- 드라마 챙겨보기, IPTV 무료 영화 보기.
- 아침에 샐러드와 커피 챙겨먹기. (나름 아침 밥도 챙겨먹는 부지런함)
- 콕 박혀있는 나를 불러주는 친구를 만나러 나가서 밥 먹고 차 마시고 들어오기.
딱 사라지지 않을 만큼의 사회생활과 문화생활과 의식주를 감당하고 있다. 잉여인간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요즘의 내가 잉여인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ㅎㅎㅎ ;;
아직은 이렇게 무너져있는 채로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과 결론을 지난주에 수긍하게 되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해봐야 금방 탄로가 나고 말테니까. 나는 아직 '전혀 괜찮지가 않다'라는 것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소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마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시간도 방식도 다 다를 것이다. 사람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그럴거 같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깊은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대로 꽁꽁 싸매고 저마다의 방에 품고 있는 거 같다. 치유는 누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거 같다. 정답은 없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유난히 읽기 힘든 수상집이었다. 유난히 죽음과 이별과 상처와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인간 본연의 두려움과 폭력과 거짓과 순수가 담겨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럴때 마다 나는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다 읽어야 다른 책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펼쳤다. 그러고는 서너장을 넘기곤, 또 다시 덮기를 반복했다. 어렵고 힘겹게 모두 다 읽었다.
어떤때는 단편소설의 이야기보다, 작가들의 노트가 더 재미있기도 했고 기발하기도 했으며, 어떤 내용은 뒤에 실린 평론가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고 깊이있게 읽히기도 했다. 모두 다 읽고 보니, 역시나 나는 이렇게 기발한 젊은 작가들의 발톱의 때만큼도 이야기를 꾸려나갈 능력이 없구나... 싶어서 좌절과 낙심의 상태가 되었다. 작가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작가를 꿈꾸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없음에 분명하다.
박민정 작가의 '세실, 주희'는 주희가 세실 같고 세실이 주희 같으며, 서로가 닮아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서로를 불편해하다가 서로, 아니 주희가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뭐가뭔지 헷갈려하며 ... 내가 느꼈던 어떤 사건과 감정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의든 타의든 내가 행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 순간, 댕!!! 혼란과 자책과 부정과 수긍과 무감정의 굴레로 빠져든다.
가끔 어떤 누군가가 굉장히 불편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 사람과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지 않을까? 돌아본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자신의 깊은 내면이 굉장히 불쾌하고 불편하며, 그 심연을 들여다 보기를 거부하며 살아간다. 자기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행동과 진실은 그 불쾌한 어떤 누군가를 통해 보게 될 수도 있다.
임성순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pg. 67
여긴 기회의 땅이니까. 이곳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이곳 교수와 평론가 눈에 들어 이곳의 작가로 데뷔하는 것이다. 실력과 운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그런 작가가 나와 일할 이유가 없을 뿐이었다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 이전의 문제였다. 이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나 같은 이에게까지 자리를 허용할 정도로 그 기회라는 것이 넓지 않았다. 내 위치는 그저 일회성 기획으로 한국 관련 기획전을 할 때 그림을 빌려줄 사람 정도로 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정치인양 착각학 있었다. 그게 싫다면 이 세계의 영원한 승리자인 자본으로 기회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면 되는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어설픈 돈으로 어설프게 비비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pg. 83
경고. 결코 겁에 질리지 말 것. 그리고 나는 노신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쇼든 현실이든 답은 늘 같았다. 모든 건 결국 돈의 문제였으니까. 어둠이 정수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걸 라이선스 할 수 있을까요?" 칠흑 같은 침묵이 파르르 떨렸다.
팸플릿이 도착했다.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제목 옆에는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서울展.'
작가노트, <하여 광고를 하겠습니다>
pg. 89
이 그럴듯한 말을 날티 나게 풀어보자면 '그저 한 명의 글 노동자가 청탁을 받아서 썼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노트라니 정말 가당치도 않죠. 그런데 왜 계속 쓰냐고요? 이 작가노트에도 원고료가 지급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고료가 지급되는 글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라 말하며 분량을 줄이는 대범한 인간은 못 되거든요. 받은 돈만큼 최대한 쓰는게 작가가 노동자라 믿고 있는 나름의 프라이드입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이 글은 올해 제 신간들이 나온다는 광고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미리 말했죠. 작가노트 같은 건 꼭 읽을 필요는 없다니까요.
임현 <그들의 이해관계>
pg. 106
해주를 잃고 해주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납득하기 힘든데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관공서에 들러 신고서를 작성하고 통신사나 각종 계약 건들을 해약했다. 그때마다 사유를 물어서 그간의 정황을 설명하고 어색한 위로를 들어야 하고 다시 실무적인 절차와 과정을 숙지해야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남들에겐 당연하게 보이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종종 다리가 저려서 밤에 잠들기 어려웠는데 진찰 결과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반신욕을 하면 좋다거나 우유나 멸치가 수면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누군가는 그것 말고 육류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불면증이 심하다고만 했을 뿐인데 내 손을 붙잡으며 햇빛을 자주 쐬고 특히 고기를 먹으라고,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잘 버텨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다 기어코 참지 못하고 은행에서 화를 내버렸다. 도장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고함을 질렀다. 다시 말해요? 그게 어디 있는지 진짜 모른다니까 그거 모두 그 사람이 보관하고 관리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pg. 117
그러고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주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형님"하고 나를 다독였습니다. 그 말이 나를 휘청거리게 했습니다. 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오경남을 찾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랬겠습니까.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 살면서 그런 것을 필요로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알맞게 불행하고 적당하게 행운을 누리다가 누군가를 위해 휘청거려주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전해주는 그런 거. 오경남의 해고로 내가 어떤 행운을 누렸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경남이 스스로를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였다는 것, 그것으로 무언가 내게 몰아주려 했다는 것,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받은 그 위로가 내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낯설더라는 겁니다.
pg. 123
울먹이는 남자를 일으켜세우는 대신 나는 그와 마주 앉았다. 마주앉아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런다고 내가 괜찮아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다독여ㅜ었다. 여전히 해주는 보고 싶고, 그립고 아픈 것들은 조금도 줄지 않았으나 그때는 그런 것들이 몹시 필요해 보였다.
해주를 떠올리면 그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또 무엇이었나, 후회하게 된다. 왜 그러지 못했나. 한번은 새벽에 내 머리를 자꾸 쓰다듬어서 잠을 설친 적이 있었다. 뒤통수가 납작해서 만지면 기분이 이상하다고 해주가 그랬는데 이렇게까지 반듯한 걸 왜 여태 말해주지 않았느냐며 신기해했다. 별것 아닌 걸로 또 유난이라고 핀잔했으나 그때는 그냥 가만 내버려두었다. 내 손을 끌어간 해주가 자기 뒷머리를 쓰다듬게 ㅐ서 정말 나랑 다르네, 대꾸만 하고 어느 순간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그랬다가도 또 얼마 안 있어 옆에서 자꾸 건드는 바람에 도로 깨기를 반복했으나 천장을 보며 바로 눕지 않고 엎드린 채 더 많은 뒤통수를 내어주었다. 누가 나를 만지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해주가 혼자서 좀 쉬고 오겠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런 기분은 여전했다. 그랬으므로 거길 왜 가려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거기가 어디냐고, 누가 거기 있는 거냐고, 무얼 준비하는 사람처럼 새벽부터 서두르는 이유가 대체 다 뭐냐고.
작가노트, <일인칭들>
pg. 127
매번 그렇듯, <그들의 이해관계>를 쓰는 동안에도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혼자 텔레비전을 보거나 양치질을 하거나 현관의 흐트러진 신발들을 정리하다가 가까운 빈벽에 대고 가만히 "너무 나 같다......" 중얼거려주기를 기대했다. 어쩌면 누구 한 사람 정도에게는 그런 순간이 몹시 필요하지 않을까. 그게 별다른 이유 없이 지금을 조금 견디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해설 김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pg. 131
'나'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왜 당신은 살아남고 해주는 사고를 당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싶은 한편, 그것이 정당한 질문인지 정녕 그래도 되는 것인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남자가 해주의 불운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뜻밖의 행운을 그저 기쁘게 누리고 있었다면 '나'는 바람대로 그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쳤을 게 틀림없다. 하나 직접 확인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남자는 나름대로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저절로 남자를 위로하고, 따뜻한 음료까지 건네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무엇이었나. '부끄러움.' 그것은 자기의 입장에서 벗어나 타인의 처지를 목도하게 되었을 때 찾아온 자성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닌가.
pg. 133
무얼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다. 했건 하지 않았건, 해주가 아니라 해주로 인해 생기게 될 문제들을 더 염려했다는 것. 해주 등을 떠밀며 서둘러 보내고 건성으로 대했던 것. 그러니까, 해주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얻을 수 있는 것과 잃게 될 것 들을 구분"(같은 쪽)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자신이 ㅎ회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끝내 "무얼 하긴 했는데 그건 해주가 아니라 다 나를 위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104쪽)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해주가 아니라 자기밖에 몰랐다고.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
pg. 143
해원은 오래전부터 내가 그 근본을 헤아리기 어려운 자신만의 조금은 난해한 (하지만 단단한) 윤리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러한 점은 우리 둘이 함께 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조금씩 가까워지던 시절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는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내는 방법을 몰랐다. 맥주를 한 캔 사서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으면 칠흑 같던 하늘이 파랗게 밝아올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못했다. 우리가 그 무렵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도 되는 것처럼 몇 시간이고 물고 늘어졌던 주제는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식물을 해치는 일은 비윤리적인가-만약 그러한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면 우리는 생존이라는 근보적이 행위에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우리는 길가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사람을 야만적이라고 여기는가, 또한 옥수수밭에서 옥수수를 수확하는 것과 수천년 된 삼나무숲을 벌목하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또는 지적재산권 침해 행위와 표절의 경계는 무엇인가-인터넷에 산포된 글이나 지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발상을 얻어 예술 행위를 했을 때 저작권은 어떻게 배분해야 되는가, ... ...
pg. 152
"그렇다면 대체 왜요? 그리고 왜 지금이냐고요." "왜냐하면 내가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야." 이모는 한 달 후에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모의 생각으로는 이별을 준비하기에 너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가장 적당한 기간이 한 달이었던 것이다. 너무 짧아서 충분히 설득할 시간이 없거나 아니면 너무 길어서 서로가 지치지 않을 만큼의 기간.
집으로 돌아온 해원과 나는 이모에 대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논쟁의 주제로 삼아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실재적이고 가까운 것이었다. 우리는 실재적인 것,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을 대화 주제로 삼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pg. 159
이모에게는 우리 외에는 가족이 없었고 몇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면 작별을 고할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이모가 그대로 스위스로 떠난다면 그녀는 누구의 이해도 받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끝까지 이모를 말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공항에 나가지는 않았다. 차마 거기 나가서 배웅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pg. 162
이모가 안으로 들어간 뒤 우리는 길에 그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에 의사 가운을 입은 나이든 여자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의사는 신청자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힘으로 약을 먹도록 도와주는 일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얼마든지 마음을 바꿀 시간을 준다고 했다. 신청자는 일 분 만에 그 약을 들이켜도 상관없고, 반나절을 고민하다가 포기해도 괜찮다고 했다. 초여름의 강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어 나와 해원은 손차양을 만들어 이모가 올라간 아파트의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처마 아래 그늘로 자리를 옮겨 아파트의 창문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처마 아래 그늘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작가노트, <그래도 하게 되는 말들>
pg. 165
미리 생각한다고 그대로 흘러가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미리 생각하는 게 쉽지가 않다. 대개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먼저 쓰고 거기에 문장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러다가 다시 쓰고 싶어지면(당연히 그런 상황은 매우 자주 발생하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하는데, 소설 한 편을 쓸 때 최소 서른 번은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어져버린다.
해설 안지영, <부단히 인간적이고자>
pg. 170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한 것 같을 때, 그래서 자신이 그저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살 의미를 찾지 못한다. '나'와 해원은 이 물음 앞에 오래 망설였고 결국 이모의 선택을 막지 못한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는 대전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동일한 조건 아래서 우리의 선택 역시 큭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죽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이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심연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한다. 법적도덕적 책임과 무관하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구체적인 책임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이 바로 죄책감의 정체는 아닐까. 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죽음인 것만은 아니다. 한 개인이 세계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이상 죽음 역시 홀로 겪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만큼이나 나와 더불어 존재하는, 그리고 함께 죽어가는 다른 생명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세희, <가만한 나날>
pg. 192
다시 한번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내게 찾아올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기로 가서 물을 마시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천을 꺼내 안경알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 나는 가상의 답변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그러자 더 좋은 답변들이 떠 올랐다. 그녀가 채털리 부인의 후기를 읽고 뽀송이를 샀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게 증명이 가능한가. 그녀와 나는 블로그 이웃일 뿐 따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먼저 정보를 접해놓고 잊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해설 이지은,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의 블로그>
pg. 209
그러나 경진의 이야기가 완전한 비극으로부터 유예된 것은 그녀의 상처 덕분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경진을 해고한 것은 'n포털의 로직'일지 몰라도 채털리부인 계정을 삭제하게 한 것은 이웃의 쪽지였으니까.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pg. 267
그토록 바랐던 고지를 눈앞에 둔 왕샤는 자신의 특장점인 성실성을 최대한 발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잠을 줄여가며 연습을 했고, 더 지독하게 살을 뺐다.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작품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는 결국 입상에 실패했다. 그렇게 돈은 돈대로 다 쓰고, 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끌려오게 된 것이었다. 재능이 없는 건 알고 있었어. 여기까지 끌고 온 건 그냥 오기였는지도 모르지.
pg. 268
누구나 자신 몫의 불행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던 것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다. 왕샤는 내게 영화를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pg. 289
애초에 내가 영화를 했던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버렸다.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페이드 아웃.
어쩌면 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꿈이나 희망, 기세 좋던 에너지 같은 것들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을 양분으로 하고 있던 것일지도. 그리고 나는 지금, 그때 내 인생의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지를 모두 골라놓은 것처럼 살고 있다. 시작도 전에 완벽히 고갈된 창작력, 최저시급을 간신히 넘기는 임금, 불법 파일 공유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를 검색하는 서른몇 살의 인생.
pg. 304
난 그때 그 순간으로 말미암아 한 시절이, 인생의 아주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끝나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원한다면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세상의 꽤 많은 것들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절, 다섯 개의 색만으로 무슨 그림이든 그릴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pg. 305
다시, 볼 수 있을까. 그 아이들. 나도 잘 모르겠어. 이렇게 다들 죽거나 사라지는 거면 결국 내 인생에 남는 건 뭘까. 왕샤는 계속해서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 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왕샤가 가장 바라지 않는 일인 것만 같았다.
pg. 318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형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철저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더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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