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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독서감상문]오래 준비해온 대답_김영하의 시칠리아

by 쭈야해피 202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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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동생이 예전에 보고 싶다고 말한 책을 불쑥 빌려주었다. 책장을 한 장도 넘기기 힘들던 6월에 한 장 한 장 넘길 수 있는 책이었다. 읽다 보니, 여행이 가고 싶어 졌고, 읽다 보니 스페인까지 가서 이탈리아 국경 한번 못 넘어 보고 온 것이 기억이 났다. 그렇게 7월이 갔다. 더디지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감사했다.

강의를 하고, 방송을 하고, 글을 쓰던 어느덧 중년이 되어가던 소설가(김영하)가 불현듯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게 된 출발점부터, 꼭 다시 가게 될 거라고 믿었던 또 믿는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의 나날들을 보내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안의 어린 예술가는 어디로

pg. 24
이런 상황에서 장편 연재는 무리 아니야? 아내가 물었지만 나는 걱정 말라고, 다 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돼. 나는 잘 나가는 벤처기업의 CEO처럼 말하고 있었다.

삶이 술술 풀리는 거 같을 때, 마음속에 문득 자리 잡고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뭘까..' 이런 종류의 질문이 내게는 늘 따라다닌다.

이 책을 끝까지 재미있게 감사하며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해 오던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문득 떠나고 싶을 때가 있고, 미친 척 짐을 꾸릴 때가 있다. 그리고 한 없이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고, 끝까지 버텨야 하는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있자니, 그렇게 문득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찼다. 떠나고 싶은 곳도 떠나야 할 곳도 없는데, 시칠리아는 어떤 곳일까? 아주 많이 궁금해졌고, 어디 남해나 소매물도 이런 곳이랑 비슷한 곳일까? 그런 생각도 했다.

미친 척 짐을 꾸리진 않는다. ... ... 내 안의 어린 행동가는 숨어버렸다. 어린 행동가가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뒷수습을 하느라 지친 현실의 생존가가 이제 그만 나타나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pg. 23
방송 역시 강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 역시 한 편의 쇼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어야 하고 또 끝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버스가 왔는데, 와서 모두들 그 버스를 타고 떠나는데, 나만 정류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저 버스에 타고 떠나야 하는데, 타고 떠나버려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정류장에 남아 있는 대가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pg. 25
"잃는 게 더 많을 거야. 내가 당신을 알아. 당신은 눈앞에 있는 모두를 만족시켜야 되는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야?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 돼? 학생들은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커나가게 돼 있어. 선생이 누구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안 그래?

pg. 27
어쨌거나 이제는 저녁마다 나 아닌 다른 예술가들이 얼마나 행복하신지, 얼마나 즐거우신지, 묻고 또 물을 일이 없어진 것이었다. 대신 미래를 대비할 중요한 수입원이 또 하나 사라졌고 이제 매달 생활비가 들어올 구석은 연재소설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제야 비로소 아침부터 저녁까지 소설만 생각할 수 있게 되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pg. 29
학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평가와 비난이 아니라 격려와 사랑을 함께 나눌 예술적 동지를 구하라. 타인의 재능을 샘내지 말고 그것을 배우고 익혀 훗날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활동을 시작할 때, 양분으로 삼고 그 어린 예술가의 벗으로 키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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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68

과연 여기가 G8, 이른바 선진 8개국 정상회담에 매년 참석한다는 그 선진국 이탈리아가 맞는 걸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바닷바람과 햇볕으로 그을린 선원들, 팔뚝에 문신을 새긴 붉은 얼굴의 백인 서퍼들, 배가 나온 엄숙한 독일 관광객들과 함께 리파리행 배에 올랐다.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었다. 지난밤 밀라노발 기차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고단한 열네 시간을 보낸 우리는 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pg. 80

리파리는 그런 섬이었다. 우리에게 자기 신분증을 흔쾌히 빌려준 그는 환전이 끝났을 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리파리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난처해하고 있으면 누군가가 다가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사라진다.

pg. 91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나는 그때의 노래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pg. 123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 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pg. 200

따라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아무도 아니다'로 소개하는 장면은 현대의 테러리즘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복면을 쓴 우티스들이 여행자의 눈을 노리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이제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pg. 274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자신 없이 말했다. 그녀 역시 조금 전의 그 이상한 버스여행이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 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녀조차도 시칠리아의 이 이상한 철도 시스템은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모르긴 해도 지난 몇 년 사이에 시칠리아 남부의 기차 이용객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본래는 멀쩡하게 운영되던 구간이 폐쇄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구간을 이용하려는 몇 안 되는 승객들, 예를 들어 그녀나 우리 같은 여행자들은 작은 버스로 실어다 주는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악순환인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라면 누가 시칠리아에서 기차를 타겠는가.

pg. 285
"Signora, prego, Écaldo.(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pg. 286
떠나는 아쉬움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여행지의 흥분, 그리고 메시나 항의 불빛으로 그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나는 모든 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차를 타고 해협을 건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는 길과 달리 떠나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였다. 나는 내 마음속의 시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과 거칠고 순박한 사람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매력으로 가득한 오래된 유적과 어지러운 거리들을 생각했다. 시칠리아는 나에게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pg. 296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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