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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독서감상문]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_다큐멘터리 산문

by 쭈야해피 2021.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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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알쓸범잡] 마지막 회에서 장항준 감독님이 추천해 준 책이었는데, 아내인 김은희 작가님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다고 해요. 어떤 전쟁 이야기도 이런 관점에서 쓰이고, 읽히고, 보인 적이 없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어나서 읽게 되었습니다.

19년에 읽은 [먼 북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이 제가 그해에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전쟁문학이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게 해 주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 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의 논픽션 전쟁문학이라는 점도 더욱 흥미요소를 일으켰습니다.

이 책은 560페이지에 달하는 매우 두꺼운 책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세계 2차 대전의 배경지 중 러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이 너무 빈약했고, 전쟁지 안에서 속속들이 일어난 잔악한 면면을 직시할 용기도 부족했기 때문인지 책장을 넘기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독일군의 잔악함은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통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밖에 일본군의 조선인에 대한 악은 너무 익히도 잘 알고 있으므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요.. 아니었습니다. 엄마의 시선, 딸의 시선, 아내의 시선, 여군의 시선에서 바라보려고 한적은 없었으므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그리고 어느 순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을 통해서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이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온다. 석고나 콘크리트 기념상처럼 단단한 껍데기 속에 있던 사람이 그 껍데기를 깨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 그리고 그 사람은 이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굽이굽이들을...... 바로 이 순간을 잡아야 한다. 놓쳐선 안 된다!  
  "결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끔찍하게 돌아가는데 결혼을 하자고? 세상이 온통 까맣게 타버리고 보이는 거라곤 시커먼 벽돌뿐인데, 결혼을 하자니..... 그래서 소리쳤어요,. '나를 좀 봐요...... 지금 내 꼴을 좀 보라니까요! 먼저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요. 꽃도 선물하고, 데이트도 신청하고, 달콤한 말도 하란 말이에요.' 얼마나 해보고 싶은 일이었는데! 얼마나 꿈꾸던 일인데! 그이를 거의 때릴 뻔했어요...... 정말 그이를 때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이의 한쪽 뺨에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그때 그이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한쪽 뺨이 발갰는데, 그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어요. 아직 아물지 않은 발간 그 상처 위로. 그때 알았어요, 그이도 내 마음과 같다는 걸. 그러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버렸죠. '그래요, 우리 결혼해요.' 미안해요. 더 이상 못하겠어요......"  

-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 중에서-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살아남은 여성 200여 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묶어서 담아낸 '목소리 소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산문을 쓰는 작가입니다. 1985년에 출간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벨라루스와 러시아에서 출간되었다고 하는데요. 1992년에는 전쟁을 영웅시하던 이들에 의해 재판까지 열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책은 탄압의 역사에 존재하던 일종의 금독서(금지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다행히 시민들의 노력으로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전 세계 35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 저는 집에서 출간된 지 37년이 지났지만,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네요.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
pg. 53
"낮에는 독일군과 독일군 앞잡이 때문에,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우리는 늘 두려움에 떨었어. 빨치산이 마지막 암소마저 가져가버리는 통에 우리 집엔 고양이 한 마리만 남았지. 빨치산은 늘 배가 고팠고 난폭했어. 우리 소를 끌고 가길래, 막 쫓아갔지..... 10킬로쯤 따라갔을까. 제발 소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어. 오두막에 아무것도 못 먹은 아이들 셋을 두고 왔다고. 그랬더니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거야. '가, 가리니까, 아줌마! 안 가면 쏴버릴 거야.' 전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어...
pg. 74
"처음에는 무서웠어...... 정말 무섭고 싫고......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적진의 동태를 살폈어. 곧 독일 병사 하나가 참호에서 살짝 몸을 내미는 게 보이더라고...... 결국 나는 큰 소리로 울고 말았어. 연습하면서 표적을 맞힐 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거기선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인 거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내가 죽인 거야.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였어.

pg. 75
딱 하나 기도했단다. '만약 내 딸이 불구가 된다면 불구로 사느니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말이다. 거의 매일 기차역으로 나갔어. 혹시 네가 기차를 타고 올까봐. 한번은 역에서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은 소녀병사를 보고는... 그대로 숨이 멎는 줄 알았지 뭐니. 넌 줄 알고. 그때부터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단다.

얘들아, 더 자라서 오렴... 너희는 아직 어리단다...
pg. 109
내가 가까이 다가갔어.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아가씨, 다른 곳을 찾아보라니까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몸을 굽혀 엄마를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어.
-엄마, 우리 엄마!
그제야 엄마도 동생들도 나를 알아보고는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어...... 울부짖는데, 아...
나는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쳐. 내 얼굴은 아직도 여자가 아니야. 걸핏하면 눈물이 나고 매일 신음을 삼켜. 내 기억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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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131

사람들 말이, 아빠가 바이올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거야...... 그 바이올린이 정말 비싼 것이었는지 어땠는지 나는 잘 몰라. 아빠는 문밖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지. '꿀 한통과 버터 한 조각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나는 그렇게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고아가 됐지... 아빠를 찾으러 나갔어... 시신이라도 좋으니 아빠를 찾아서 아빠랑 있고 싶었지.

pg. 143

드디어 전선에 도착했어.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건 소총이 아니라 커다란 솥단지와 빨래통이었어. 전선에 온 여자아이들 모두가 내 또래로 집에서 한창 부모님 사랑을 받을 나이였지. 나만 해도 우리집 외동딸이었고. 그런데 다들 전선에 와서 무거운 장작을 나르고 난로에 불을 때는 거야. 비누 대신 재로 솥단지들을 씻고. 비누가 다 떨어져서 공수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 병사들의 속옷은 지저분하고 이가 들끓었어. 그리고 피범벅이었지...... 겨울이면 피가 얼어붙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몰라......"

나 혼자만 엄마한테 돌아왔어...

pg. 179

-아저씨, 어떤 아저씨가 여기 이거 갖다드리고 해서요......

-어떤 아저씨?

-항상 군복 입고 다니는 아저씨 있잖아요. 속티셔츠는 잘 안 입고......

우리는 어떤 중위니, 어떤 대위니 하는 식으로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했어. 다른 식으로, 이를테면 '잘생겼다거나 못생겼다' '대머리이거나 키가 크다'는 인상착의 같은 걸로 사람을 인식하고 구분했지. '아, 그 키 큰 사람!' 그러면 그제야 누군지 알겠는 거야.

pg. 188

예를 들어,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 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우리집엔 두 개의 전쟁이 산다...

pg. 200

몇십 년이 지나서야 유명한 여기자 베라 트카첸코가 중앙일간지 '프라우다'에 처음으로 우리 이야기를 실었어. 여자들도 참전했다는 기사를 쓴 거야. 그리고 그 여인들이 지금 홀로 남겨져 집 한 칸 없이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렸지. 우리는 이 신성한 여인들에게 빚을 졌다면서. 그제야 사람들이 여성 참전용사들에게도 조금씨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 마침내 정부에서도 나이가 사오십이 되도록 집도 없이 기숙사에 살고 있던 이 여인들에게 집을 내주기 시작했고.

... ... 그런데도 자신이 상이군인이며, 그래서 특혜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오히려 모든 증빙서류들을 찢어버렸지. 내가 '왜 찢었느냐'고 물었어. 친구가 울면서 그러더라고. '그럼 누가 나와 결혼하겠어?' '그래, 그렇겠다. 잘했어'라고 말해줬지. 그러자 이번에는 더 서럽게 우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 서류들이 너무 필요해. 몸이 너무 아파.' 상상이 돼? 그러면서 울었어.

전화기는 사람을 쏘지 않잖아...

pg. 208

그 프랑스인이 꺼이꺼이 우는거야...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2차대전이 미국 혼자 히틀러와 싸워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어요. 소련 사람들이 그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소련 사람이 치른 2천만 명의 목숨값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겪은 고통, 그 극심한 고통에 대해서도 잘 모르죠. 고맙습니다. 당신이 내 심장을 흔들어놓았어요.'

pg. 219

아무튼, 나는 의사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결국 중위는 병원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어. 내 다리를 자르지 않기로 결정이 났지. 새로운 의술로 치료해보기로 계획을 바꾼 거야. 그리고 두 달 후에 나는 벌써 걷기 시작했어. 그야 당연히, 목발을 짚고 걸었지만. 다리가 꼭 널어놓은 빨래처럼 흔들거리고 아무 감각도 안 느껴지더라고. 그냥 보면서 내 다리구나 했지. 차츰 목발 없이 걷는 연습을 했어. 사람들이 나보고 '다시 태어났다'며 축하해줬어. 퇴원하고 휴가를 받았지. 하지만 휴가는 무슨 휴가? 어디로 갈 건데? 누구한테? 나는 내 소속부대로 돌아갔어. 내 대포로 가서 다시 동료들에게 합류했지. 열아홉 나이에......

pg. 221

30년이 지나서야...... 모임에 초대도 하고......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겻어. 우리는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pg. 225

우리는 동정이 필요한 게 아냐.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우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사람이지."

....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 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

pg. 281

한동안 마음이 계속 그랬어요. 총도 쏘기 싫고. 이해하시겠어요? 속으론 '왜 남의 땅에 함부로 들어온 거야?'라는 적개심에 치가 떨리는데도 막상 적을 죽이려고 하면 무섭고. 무섭다는 말밖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정말 무서웠어요. 막상 총을 들면......

pg. 295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에 더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 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 명이 보여요. 젊은 울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요...

우리는 쏘지 않았어...

pg. 309

낮이고 밤이고. 밀가루 반죽은 또 왜 그리도 빨리 떨어지던지. 통 하나를 가득 채웠다 싶으면 금세 다른 통이 비는 거야. 우리는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빵을 구웠어......

pg. 332

그래,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온몸이 아프고 쑤시기 시작했어. 몸은 아파 죽겠는데 원인은 모르겠고. 할 수 없이 의사를 찾아갔지. 만약 그때 전문가를 찾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내가 대단히 용맹무쌍한 사람이라고 여태 믿고 살았을걸. 아주 노련한 신경과 전문의가 내 나이를 묻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겨우 스물넷에 자율신경계가 완전히 망가지다니!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내가 대답했지. 잘살 거라고. 무엇보다 나는 살아 있었으니까! 아,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몰라. 그래, 나는 살아남았어.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범하게 살기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관절이 다 부어오르고 오른팔은 심하게 쑤시면서 말을 듣지 않았어.

군인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직은 더 예쁘고 싶었는데...

pg. 366-367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모르겠어... 아니, 당신이 묻는 말이 뭔지는 알아.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 내 말로는...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지? 그러려면... 필요한데... 고요한 밤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불현듯 떠올라. 그러면 온몸에 경련이 일면서 죽을 것만 같지. 숨을 쉴 수가 없어. 으슬으슬 오한이 나고. 그렇다니까.... 어딘가 표현할 말이 있을 텐데...... 시인이 필요해...... 단테 같은 시인이......"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pg. 395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그들은 또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pg. 407

잠시 후 우리는 방공호에 앉아 차를 마셨어. 남자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했어. '아내가 남편을 찾아 최전선까지 왔다. 진짜 아내다. 서류가 그걸 증명한다. 세상에 이런 여인이 있다니! 이런 여인을 어떻게 안 만나볼 수 있겠나!' 다들 그렇게 말하며 눈물지었어. 나는 그날 저녁을 평생 잊지 못해... 그것 말고 나한테 뭐가 더 남았겠어?

나는 간호병 신분으로 남아 있게 됐어. 남편을 따라 정찰도 다녔지. 한번은 박격포가 발사됐는데 병사 하나가 픽 쓰러지더라고. '죽었을까? 아직 살아 있다면?' 생각하면서 그쪽으로 뛰어갔지. 박격포가 또 불을 뿜었어. 지휘관이 막 소리를 질렀어. - 어디 가는 거야, 이 빌어먹을 여편네야!

부상병 쪽으로 기어갔어. 살아 있었어...... 살아 있더라니까!

pg. 409

그래서 거의 남편에게 닿을 듯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는데 느껴지는 거야, 이미 끝이라는 게. 일이 분 후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게...... 저녁이었어. 9시 15분...... 몇 분이었는지도 기억나... 나도 죽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지. 아이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어.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 손자도 바샤야 ... 바실료크...



pg. 414-415
"우리 남편은... 지금 남편이 일하러 가고 없어서 다행이야. 남편이 나한테 입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거든.. 남편은 내가 우리 연애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닌다고 싫어해... 세상에, 붕대로 하룻밤 만에 웨딩드레스를 만들지 않았겠어, 그것도 내가 직접.

남편이 지도 보는 법을 가르쳐줬어.. 이틀 동안 나를 붙잡고 어디에 어떤 전선이 있는지... 우리 부대 위치는 어딘지 가르쳤지... 내가 지금 가져올게. 남편이 말하는대로 받아 적어놓았거든. 내가 읽어준다니까... 왜 웃어? 웃으니까 정말 좋네! 참, 나도 우습지.. 글쎄 내가 무슨 역사학자라고! 차라리 붕대 웨딩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가져오는게 낫겠어. 지금 보여줄게. 나는 그 사진이 정말 마음에 들어...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내가......"

pg. 426
나는 평생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어... 그 순간...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 그 사람은... 임시 막사에 누워 있는데... 그 순간... 나는 행복한 거야... 그 자리에 서서 속으로 웃었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 사람도 내 사랑을 알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 설레면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지. 그때까지 나는 남자에게 한 번도 입을 맞춰본 적이 없었어... 그게 첫 키스였어......

pg. 430
나는 벌을 받은 거야... 무슨 죄냐고? 아마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닐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나이가 들어서는 부쩍 더 그래...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을 꿇고 창밖을 바라봐. 그리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지...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어. 오래전에 용서했거든. 딸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데... 남편이 우리 모녀를 보더니... 잠깐 있다 가버렸어.

씨감자에 대하여...
pg. 453
내가 마리야를 안고 다녀요... 40년을. 어린애 안듯... 2년 전에 집사람이 세상을 떴어요. 눈을 감으면서 나를 용서하더군요. 젊은 날의 잘못이라고... 모두 다 용서해줬소... 하지만 마리야는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아내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소... 나는 죽는 게 무서워요. 내가 죽으면 우리 마리야 혼자 남으니까. 누가 마리야를 안고 다니겠소? 누가 밤마다 마리야를 위해 기도하고? 누가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냔 말이오......

엄마, '아빠'가 뭐예요?
pg. 507-508
알고 싶어...... 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 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니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경은 철통같이 튼튼하다...' 이 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책임이냐고...... 묻고 싶어...... 이제는 물을 수 있어...... 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린 무섭거든. 두려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

갑자기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어...
pg. 552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해봐. 대체 어떤 얼굴로 그 일을 회상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 톨스토이


책을 읽는 중에도 너무 많은 눈물이 나서 읽다가 접고, 읽다가 덮어두기를 반복했습니다. 수많은 문장에 표시를 해 두었는데, 포스팅에 3분의 2정도를 옮겨 담아둡니다. 이 글귀들을 옮기면서도 계속해서 눈에 눈물이 고이고, 코를 훌쩍이게 되네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가슴 아프고 답답하고 침통한 기분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대신해 봅니다.

"우리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눈감아버리는 비겁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우리의 유전자 속에 전쟁이라는 DNA가 새겨져 있고, 그래서 전쟁의 대물림이 필연인 것처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우리의 의식이 늘 깨어 있도록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 2015년 가을 박은정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도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는 내가 되어가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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