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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나는 유령작가입니다_진실 그너머에 짐작이 있을 뿐

by 쭈야해피 2018.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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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대산문학상을 받았다는 김연수 작가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를 도서관에서 빌렸다.
2016년 문학동네에서 초판을 인쇄발행했다고 하니, 소설도 상품이라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회사에서 발매하면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도 늘어가는 것인가? 무튼 문학동네에서 김연수 작가님과 김영하 작가님 예전 소설들을 새롭게 발행하여서 나는 좋다.

이 소설집은 각 문장이 꽤나 어렵고, 한자와 외래어가 종종 섞여있어 스킵을 하는 사태도 발생하였지만~ ㅎㅎ 끝까지 잘 읽었다.

헤드카피는 "그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에 매료됐다."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에서는

 이 책에서 '나'는 너무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좀 어렵게 됐다. 그 생각을 하니 배가 고프다. 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나'는 유령작가가 됐다. 더 많은 이야기. 이제 내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잠도 안 온다.

라고 고백했다.

9편의 중단편 소설 속에는 각각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과 우리가 알법한 혹은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등장인물이 나오고 그들의 시대와 환경 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 넣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각종 책과 자료, 기록들에 나온 내용 중에 혹시나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작가의 상상의 이야기를 아니, 상상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그럴법한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래서 거짓말이라고 하였지만, 그 거짓말을 사실로 구성하기 위해서 한 문장 한 문장 또 그 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얼마나 치열하게 썼을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그 한 문장을 읽기위해 다른 책들을 보다 좀 더 오래 읽었던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나도 나름 감상문을 남겨 놓는 것이겠지.

올해는 경제활동을 시작하지 못했는데도 바빴다. 공모전들이 있었고, 비록 몸이 아파 1군데 밖에 지원하지 못했지만, 나름은 그 일로 바빴고, 지쳤고, 고민했다. 그 속에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도 읽었고, 폴 서루의 <세상의 끝>도 반쯤 읽었고, 카네기의 <행복론>도 읽었고, 공모전 준비하느라 자료책들도 엄청 읽었는데, 감상문은 이거 하나만 쓴다. 짧디 짧은 나의 기억력을 위하여,,

그리고 감상문 뒤에 붙이는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 너무 많이 표시되어 있어서.. 아! 이를 어쩐다.. ;; ㅎㅎ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pg. 16

 이윽고 남자가 지도를 건네면서 "더이상 기다리지 않을 때, 끝나는 법이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웃으며 "방금 장마가 언제 끝날까라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옆구리에 낀 채,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왔다.

 

pg. 20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따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가끔씩 혼자서 중얼거릴 때가 었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pg. 23

역사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왜 이혼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만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납득이 안 되면 이렇게 덧붙이겠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알렌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녀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 말이다. 그녀와 내가 헤어진 지금,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첫 단편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와! 이거다!' 였다. 도무지 연관성이 없어보이던 헤어진 두 성인 남녀의 이야기와 박지원의 지구의, 개화기, 조선의 패망과 같은 이야기가... 마침내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는 순간.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화자가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던지자,,, 늘 언제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의 소식들이 들려올때... 그래야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소망이 없을때는 마침내 기다림도 없고 정말로 끝이 나 버리니까 말이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pg. 40

과거란 자신에게 유리한 몇 개의 증거만 현장에 남겨두고 도주한 범인과 비슷하다. 지난 일들을 이해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억들을 샅샅이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은 거의 없다. 남편이 어떤 일을 상상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하는 내내 그녀는 자신의 기억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pg. 46

 "네즈미든 사루든,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지금의 내 모습이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 이제 나를 알게 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당신에게 중요할 턱이 없지 않나?"

 

pg. 59

"... 인생의 오 년이란 얼마나 길고, 또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 그 오 년 동안이나 내가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자신만의 삶이 있었던 남자. 평생 그를 사랑하리라고 수없이 맹세하게 했던 남자, 그러나 과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 그 남자가 죽어가는 동안, 나는 거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어. 가만히 앉아서 그해 봄에 보았던 벚나무를 생각했어. 바람 때문이라기에는 너무 심하게 벚나무 가지가 흔들렸지. 그랬었지. 작은 새였지. 그랬었지."

 

pg. 60

봄날 오후, 현관문이 열린 집안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연신 불안한 꿈이 드나드는 잠 속에 세희는 빠져있다.

 

상황과 단어와 수식어들 모두 취향저격. (>.<)꺅~!ㅎㅎ 씁쓸하지만 사실이겠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과거의 기억들은 모두 나에게 유리한 증거들만 남겨놓았다는 것. 봄날 흔들리는 벚나무를 보았는데,, 바람 때문이라기에는 너무 심하게 흔들렸다면, 그건 새였을까? 아니면,,, ,,,

뿌넝숴(不能說)

 

pg. 69

조심하게. 사실 전쟁은 재미있지만, 전쟁 이야기는 재미없어.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 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 내가 전쟁이란 삶을 닮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누가 자네에게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먼저 하품을 하게나. 지금 내 꼴이 그렇긴 하지만. 삶은 살아가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pg. 77

...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지하당원들 사이에 오가는 서신이었던 거야. 그렇게 나는 길을 오가며 혁명의 도리를 깨쳤어. 그런 급박한 시절에도 나는 봄비가 내리면 가만히 서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단 말이야. 때로는 나몰래 꽃이 필까봐. 때로는 나 몰래 꽃이 질까봐. 제아무리 긴급한 편지였다고 하더라도 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선배들이 나를 두고 '샤오멍', 그러니까 꼬마 맹호연이라고 놀려댔지. "밤사이 비바람 소리 들리더니,/꽃이 얼마나 떨어졌는지(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시를 쓴 맹호연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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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80

그 처참한 광경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뿌넝숴. 뿌넝숴.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에 기록되는 게 아니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몸에 기록되는 거야. 그것만이 진짜야. 떨리는 몸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말해주는 게 바로 역사야. 이 손,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잘려나간 이 손이 진짜 역사인 거야. 생각해보게나. 조선전쟁이 일어난 지 채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나라로는 한때 우리가 괴뢰군이라고 부르던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지 않는가? 지평리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린 셈이지. 고작 일백 년도 지나지 않아 망각할 그런 따위의 사실을 기록한 책과 기념비라니.

 

pg. 81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계속하라고 채근했고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때의 일은. 살아 있다는 건 그토록 부끄럽고도 황홀하고도, 무엇보다도 아픈일이더군. 아프다는 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게 그 순간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어.

 

pg. 87

내가 중국어로 시를 읊조리자, 무슨 말인지 모르던 남조선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쳤다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네. 그 집에서 나는 그녀에게서 천 그램이 넘는 피를 수혈받았다네. 나는 지평리에서 그렇게 살아남았다네. 그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네.

가장 인상 깊은 단편이었다. 마지막을 읽고서는 한 동안 멍... 아마도 가장 극적이고, 가장 아름다우나, 가장 슬프면서도 인간임이 살아있음이 잔인하고 고마워서였겠지.
역사라는 건 책이나 기념비가 아니라고, 일백 년도 안 되어서 다 잊혀진 그런 거 따위... 라는 말을 듣고 보니, 참 속상하고 죄송하다. 그래도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몸에 새기며 살고 있는 거겠지.

거짓된 마음의 역사

 

pg. 108

미합중국 군대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처음 건네준 선물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다 마시고 난 배스(Bass) 맥주병 열 개입니다. 1871년 아시아함대 사령관인 로저스 소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배로 찾아온 세 명의 조선 관리에게 선물로 빈병 열 개를 줬습니다. 뉴역에서 듣기에는 총신을 이빨로 씹어먹은 아프리카 고릴라에 대한 얘기처럼 황당하겠지만, 그 얘긱 허풍이 아니듯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극동에서 빈 유리병은 친밀감을 나타내는 아주 좋은 선물이라 보이들에게 빈병을 팁으로 주기도 합니다.

 

pg. 117

이곳에서 우리는 늘 전날의 몸으로 다음날을 살아갑니다. 이곳이 왜 은자의 나라인지 아십니까? 총칼을 앞세우고 여기로 찾아온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를 찾지는 못할 것이기 때무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이곳에서 갈아가는 우리에 대해 귀하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제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그 하루를 생각하면 누구도 온전한 존재로 날짜변경선을 넘어올 수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pg. 122

두 남녀가 만나 느닷없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일이다.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나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결혼하게 될 것이고, 또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함께 인생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또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한 사람의 죽음을 다른 사람이 지켜보게 될 것이다. ... ... 마찬가지로 두 남녀가 사랑한다고 해서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g. 135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그 꿈들은 그가 가졌던 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느닷없이 터져나온 눈물은 마음을 한결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울음을 터뜨리기 전까지만 해도 일어난 일을 부인하던 마음이 울음을 계기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총동원해. 그 문장을 통해 그는 세상에는 아무리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걸 납득했다. 눈물이 흐르고, 그다음에 우울이 지나갔으며,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슬픔을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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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140

소설 안의 모든 문장은 서로의 인과관계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개개의 문장은 모든 문장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그 어떤 문장도 외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짐작하겠지만, 그가 쓴 소설에는 그와 죽은 여자친구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문장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처음에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문장을 서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안가힘을 다 썼다.

 

pg. 147

그러니까 알파인 스타일로 움직이라는 뜻 아닙니까? 혼자서 세상 고통 다 짊어지지 말란 말이야. 선배가 소리쳤다. 그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이제 모든 게 지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끝났다.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지만, 패배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기에 패배는 없다.

 

pg. 150

꿈속이었지만, 그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하지만 더 괴로운 것은 여자친구에 대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늘 그는 "걔는 죽었어. 걔는 죽었다고"라는 문장과 함께 눈을 떴다. 꿈속에 있다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버린 다음의 세계로 눈을 뜨는 일은 언제라도 괴로웠다.

 

pg. 152

그날 저녁에 그는 출판사의 기획위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나때문에 따라간 자리였다고 그는 썼지만, 나와는 거의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박종철이가 죽었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거야. 군부가 가만히 있을까? 그러니까 잘해야지. 뭘 잘해? 학생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한 명만 더 죽는다면 아마 나라가 뒤집힐 거야. 치안본부에서 탁 치면 되겠네. 술자리에서는 혼란스런 시국을 둘러싼 얘기가 두서없이 오갔다. 그러다가 편집장이 그의 소설 얘기를 꺼냈다. 이런 시국에 그런 소설이 먹혀들까?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 그런 소설이.....

 

pg. 155

하지만 교수님은 다 아시잖아요. 고작 227행뿐인 두루마리를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쓰시잖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몸을 일으킨 뒤, 그를 잡아세웠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그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우리는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의 짐작과는 달리, 그 순간 나도 사랑에 빠졌다.

 

pg. 164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상상하면서 주석을 다는 나나 내 일상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나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짐작만 할 뿐인 원정대원들이 그런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짐작할 뿐이었다. 한 학생의 죽음이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건 오해에서 비롯한 일일지도 몰랐다.

 

pg. 166

실제로 베이스캠프에 있던 다른 나라 원정대들은 특수부대를 연상시키는 한국 원정대의 엄격한 규율과 과중한 임무를 농담거리로 떠들어대곤 했다. 외국 산악인들은 한국 산악인들의 상명하복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pg. 172

뉴스에서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을 동맹국과 우방국에 요청했다는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 내용과 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를 요구하는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 내용과 올림픽 남북한 공동개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몸을 뻗어 장미 넝쿨이 뻗어나간 담장너머를 내려다봤다. 노란색 보안등이 켜져 있었지만, 담장 밑 골목길은 어두웠다. 내게 보낸 편지에다 그는 언젠가 그 축대를 기어올라간 적이 있었다고 썼다. 제가 워낙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고 싶어하는 성격이어서. 그 축대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 ... 참,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토번에 쫓겨 수령과 백성을 버리고 소발률로 들어간 왕은 어떻게 됐습니까?


30년 전, 젊은이들의 죽음.
김연수 작가의 소설 중에 운동권이었던 그 젊은이들의 사랑, 일상, 소망 그런 소재들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역사, 전쟁이야기, 사랑이야기, 변혁이야기, 스릴러, 가족드라마, 자아발견, 성장통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잘 접할 수 없는 역사시간에도 배우지 못한, 하물며 태백산맥, 아이랑, 토지,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등 고교시절 읽은 많은 대하역사소설에서도 민주화이야기는 많이 읽어보지 못했던거 같다. 더욱이 그들의 일상이라면야... 언제나 궁금한 이야기들이다. 짐작만 할 수 밖에 없겠지만...

남원고사(南原古詞)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pg. 197

 "저희는 서로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건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제게 저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하는 불망기를 적어주셨습니다. 저 역시 그분을 영원토록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사랑에 반상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그런즉 대담하고 겁 없는 말씀이오나 이제 저를 더이상 노류장화 취급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춘향전에 대한 기발한 시각.
그나저나 나도 언젠가 사랑을 만나면 저 '불망기'를 적어달라고 한다면, '무슨 조선시대 이몽룡과 춘향이 적 고리타분한 사랑관이냐고?' 질타를 받게 될까? ㅎㅎ... 사랑에 시대가 어딨어, 흥~!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pg. 230

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성재는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는 버릇을 그만뒀다. 세상의 일들은 늘 짐작과는 달랐다. 하늘을 날던 그 새들이 갈매기일 수 없듯이, 해림에는 바다가 없듯이. 더이상 세상의 일들을 짐작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인생이란 그저 사소한 우연의 연속처럼 보였다. 이제 성재에게 인생이란 납득하는 일이지, 따져보는 일이 아니었다.

 

pg. 232

그렇게 추운 지방에 하얼빈처럼 큰 도시가 있을 줄이야.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오면서 성재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모르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인생도 있다. 성재도 그렇게 살 수 있었다. 하얼빈은 몹시도 추운 도시라는 것, 해림에는 바다가 없다는 것, 우덕순은 이토 히로부미를 쏘지 못했다는 것, 성재는 그런 따위는 모르고 살 수도 있었다.

 

pg. 233

도무지 그 대답을 짐작할 수도 없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성재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낯을 잔뜩 찌푸렸다가, 또 세수하듯 두 손으로 차가운 얼굴을 문질렀다가, 돌아서서 성수를 찾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재의 등뒤로 거대한 물음표처럼 성소피아교당 둥근 지붕이 서 있었다.


이등박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한문식 표기 이름. 난 이제서야 알았네.. 이런!
그런 따위는 모르고 살 수도 있었다. 한 번씩 질문해 보는 그것. 만약에... 성재가 성수를 챙기지 않았다면 ... 하얼빈과 해림과 우덕순은 모르고 살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짐작할 수 없이 일어난 그 수 많은 일들도..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pg. 241

그도 그럴 것이 장안의 한다하는 난봉꾼들에게도 정희의 교수법은 가혹하기만 했으니, 가족과 국가의 위생관념을 철저하게 믿는 이 친구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이런 무참한 꼴이란 모던 연애를 배우기 위한 월사금 정도로만 여기는 게 가장 좋으련만. 나는 오른손 검지로 아랫입술을 툭툭 치면서 이 친구를 잘 타일러 가족과 국가의 안전한 품으로 다시 보낼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비를 맞고 서서 쉽게 돌아갈 것 같지 않은 그와 그가 마냥 내 이야기인 것만 같다. 모던 연애를 배우기 위한 월사금 정도로만 여기는 게 좋을텐데. 어디 그게 마음처럼 쉽던가 말이지.. ㅎㅎ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pg. 274

인간은 자신의 진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반추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게 허상이라는 것을 아는 한, 더이상의 진실된 성찰이란 있을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진짜 착한 사람을 알아차리지는 못해도 착한 사람을 가장한 사기꾼에게는 번번이 속아넘어가는 것처럼 그이는 그토록 열렬하게 연기했기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며 한편으로 그이는 한 번도 친일파였던 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던 시대. 자신의 진상이라고 스스로는 깨달을 수 있었을까? 친일파든 인민군이든 한 사람의 든 사랑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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