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돈을 버는 일이든, 꿈을 이루는 일이든, 나에게 글이라는 것은 두 가닥으로 나누어 뇌를 움직이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좀 더 숙달되어 어느덧 나의 일부가 되면, 그때는 두개의 뇌를 움직여 두개의 글을 동시에 쓰는게 가능할까?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살짝 흥분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블로그에 글을 꼬박꼬박 쓸 수 없음을 스스로에게 타협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아직 여력이 없다고 해두는게 좋을 것 같다.
남한산성을 영화로 보고 다시 집어든 지 어느덧 두달이 넘었다. 이제서야 다 읽었다.
빼곡하게 접어둔 마음을 움직인 단락들을 보니, 읽다 멈춰서고 이해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그 만큼 많았던 것 같다. 10년 전 2007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때도 그랬을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감상문 한장을 남기지 못했으리라 미뤄짐작해 본다. 쉽지 않은 책이었고 쉽지 않은 역사의 자락이었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했을거 같다는 생각이 책을 다시 덮으면서 들었다.
'나는 살고자 한다...'는 말을 내뱉었던 왕의 의중. 수백년 후 후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행간은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왕의 길이 있고, 신하의 길이 있고, 백성의 길이 있겠지.
약소국의 길이 있고 강대국의 길이 있을 것이다. 강대국은 여러차례 일어서고 스러지고 커지고 사라졌지만, 굽히고 무너지고 울음을 삼켰던 변방의 작은 나라는 쉽게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길이었다.
내부가 소란스러워 말과 말이 뒤엉켜 스스로 멸망할 것이라 비춰졌던 그들이지만,
명길과 상헌의 충심이 다르지 않고
백성을 어여삐여기라는 아비들의 당부가 어린 왕들에게 미약하나마 살아 남아 이어지고 이어져서 탐관오리들의 횡포도 견뎌내고, 버티고,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 ,,, 결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이가고 봄이오고 민초들이 씨앗을 뿌렸듯이 우리의 오늘도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린다.
두번째 읽은 이 책은
10년 전의 내가 10년 후의 내가 되었듯이 10년 전의 대한민국이 이제 더 이상 그 때의 우리가 아니듯이 내게 많은 질문들과 또 많은 답변들을 주었다.
여전히 책장이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어려운 문장들이었다. 역사는 변함이 없고 그 시절을 읽어내려 담아내려 노력한 소설가의 문장은 여전한데 말이다.
오늘을 평가하고 논하는 수 많은 매체들의 덧없는 기사와 말말말에도 불구하고, 그 한가지 변함없는 사실이 기대를 하게 한다. 역사는 말없이 이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있다. 후손들은 훗날 오늘을 다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진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백성을 어여삐여긴 왕과 그 신하들의 행동은 오래고 살아남아 이 땅과 기억과 문장에 남을 테니까...
pg 4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악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드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 2007년 4월 다시 봄이 오는 남한산성에서 김훈은 쓰다.
뱃사공
pg 44
- 순한 말이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가져라.
사공의 얼굴에 힘없는 웃음기가 스쳤다.
- 고마우신 말씀이나, 천한 사공이 배를 타지 어찌 말을 타리까, 더구나 눈이 쌓여 말먹이 풀을 구할 길이 없으니.......
pg 46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 쓰러졌다.
말먹이 풀
pg 84
주린 말들은 묶어 두지 않아도 멀리 가지 못했다. 말들은 모여 있어도 제가끔 따로따로인 것처럼 보였다. 말들은 주려도 보채지 않았다. 먹을 때나 굶을 때나 늘 조용했다. 말들은 고개를 숙여서 눈 덮인 땅에 코를 박았다. 그러고는 앞발로 눈을 헤치고 흙을 긁었다. 말들은 흙냄새 속에서 아직 돋아나지 않은 풀냄새를 더듬었다. 말들의 뼈 위로 헐렁한 가죽이 늘어져 있었다. 언 땅 밑에서 풀냄새는 멀었다. 말들은 혀를 내밀어서 풀뿌리를 핥았고, 서로의 꼬랑지를 빨아먹었다. 주저앉은 말들은 갈비뼈가 드러난 옆구리로 가늘게 숨을 쉬었다. 말들은 주저앉아서도 코를 땅에 박고 풀냄새를 찾았다.
... ...
말들의 죽음은 느리고 고요했다. 말들은 천천히 죽었고 질기게 숨쉬었다. 옆으로 쓰러져 네 다리를 길게 뻗은 말들도 사나흘씩 옆구리를 벌럭거리며 숨을 쉬었다. 숨이 다한 직후에 묵은 똥이 비어져 나오고 오줌이 흘러나오는 소리 외에는, 말들은 죽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pg 89
... 전하께서도 한때의 곤고를 피해 이 성에 드셨으니, 온조왕의 신령이 반드시 전하를 보우할 것입니다. 온조왕 사당에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장지문 너머에서 임금이 타구에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임금이 대답했다.
- 그리하면 경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 전하, 어려울 때는 근본을 돌알본다고 신은 배웠나이다.
- 좋은 말이다. 나도 어렸을 때 그리 배웠다.
- 전하, 오직 근본에 기대어 회복을 도모하소서. 근본은 일월과 같은 것이오니.....
- 뜻의 절박함을 알겠다. 관량사에 명하여 제물을 얻어주마. 경의 뜻을 시행하라.
김상헌의 이미가 마룻바닥에 닿았다.
- 신의 뜻이 아니라, 전하의 뜻으로써 거행하겠나이다.
- 그리하라. 근본이라는 말이 새롭구나. 내 늘 간직하겠다.
초가지붕
pg 93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 ...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서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pg 95
- 대감, 옥관자가 빛나는구려. 우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한판 크게 지휘해주시오.
군병들은 낄낄 웃었다. 그날이 머지 않았는데, 버티는 힘이 다해서 성문을 열고 나가 투항하는 날, 저것들을 모두 청의 포로로 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 전에 싸움터로 내몰아 모두 없애야 하는지, 그날까지 저것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인지 김류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것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김류는 생각했다.
pg 101
포위된 성 안에서 성첩을 비워놓고 성 밖을 향해 병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다. 김류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김류는 싸울 수 없던 싸움을 성 안에서 다시 싸우려는 것인가, 그것이 영상의 싸움이고 제찰사의 싸움인가를 이시백은 물을 수 없었다. 척후는 끝내돌아오지 않았다.
- 시행하라.
김류의 수하들이 이시백을 곤장틀에 묶었다. 이시백은 형틀 위에 엎드렸다. 차가운 땅에서 비린 눈냄새가 끼쳐왔다. ... 저녁 눈발 속으로 떠난 척후들은 적이 닿지 않은 남쪽 바닷가 어디쯤으로 갔을까. 적의 군복을 입고 적의 척후가 되어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이시백은 더듬어지지 않는 척후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매를 기다렸다.
계집아이
pg 114
임금이 삼경 무렵에 잠자리에서 승지를 불렀다.
- 수어사는 어디에 있느냐?
- 서장대에 있을 것이옵니다.
- 내의를 깨워 수어사에게 보내라.
승지가 행각으로 건너가 내의를 깨웠다. 내의가 말린 장군풀 뿌리와 생강즙을 싸들고 서장대로 올라갔다. 임금은 밤새 뒤척였고, 미닫이 밖 마루에서 승지는 꿇어앉아 시린 발을 주물렀다. 달이 기울어 마루는 캄캄했다. 사경이 지나자 첫 닭이 울었다. 임금이 다시 승지를 불렀다.
- 어제 내가 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냐?
- 나루라 하옵니다.
- 나루라면 내가 건너온 송파나루냐?
- 사공의 자식이니, 이름이 그러할 것이옵니다.
- 밝거든 곶감을 몇 개 보내주어라.
임금은 동틀 무렵에 잠들었다.
똥
pg 117
마을에 내려올 때마다 김상헌은 서날쇠를 눈여겨보았다. 서날쇠의 집은 마당이 깔끔했고 돌쩌귀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손님이 끊겨 일거리가 없었으나 서날쇠의 대장간은 단정했다. 풀무에는 기름이 쳐져 있었고, 모루가 반들거렸으며, 화덕 밑에 묵은 재가 없었다. 크고 작은 망치며 집게가 시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상헌이 서날쇠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나루가 뒤란에서 나와 절했다. 고개 숙인 목이 희고 가늘었다. 언 강 위에서 돌아서는 사공을 향해 환도를 빼들 때, 사공의 목은 가늘어 보였다. 사공을 죽이고 그 딸을 거두게 되는 인연에 감상헌은 몸을 떨었다. 남한산성을 향해 청음석실을 떠나던 날 새벽에 받은 형 김상용의 편지가 생각났다. ...참혹하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 나루의 절을 받게 되는 인연도 형이 말한 '당면할 일'인가 싶었다.
pg 121
- 그렇겠구나. ... 그렇겠어.
김상헌은 똥국물에 시선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몸이 성안에 닥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대, 창검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느냐...... 냄새는 선명하게 몸에 스몄다. 김상헌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머리 하나
pg 141
예조판서 김상헌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내리쳤다. 김상헌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pg 143
최명길은 계속 말했다.
- 전하, 그만 할 일이 아니오니 신의 말을 막지 마옵소서. 장마가 지면 물이 한 골로 모이듯 말도 한 곳으로 쏠리는 것입니다. 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묘당의 말들은 이른바 대의로 쏠려서 사세를 돌보지 않으니, 대의를 말하는 목소리는 크고 사세를 살피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사세가 말과 맞지 않으면 산목숨이 어느 쪽을 좇아야 하겠습니까.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상헌을 충렬의 반열에 올리시더라도 신의 뜻을 따라주시옵소서.
돌멩이
pg 150
- 정명수가 사이에 끼면 그 자에게 휘둘리지 않겠는가?
- 정명수는 오래 상종한 자이옵니다. 신이 요령껏 대처하겠나이다.
- 서둘러라. 떠날 때 들어와서 인사하지 마라. 조용히 다녀오라.
최명길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훑어 냈다.
- 전하, 신을 적진에 보내시더라도 상헌의 말을 아주 버리지는 마소서.
임금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쳤다.
- 경의 말이 아름답다. 내가 경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다. 아마 지금쯤 상헌의 생각도 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 그리 짐작한다.
pg 161
pg 172
pg 193
돼지기름
pg 212
대낮의 질청은 조용했고 햇볕이 마루 깊숙이 들어왔다. 최명길은 마루를 물걸레로 닦고 마당의 눈을 쓸고 아궁이의 재를 긁어냈다. 김상헌의 처소는 동쪽 세 번째 방으로, 최명길의 방과 대청을 건너 마주보고 있었다. ... ...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는 질청 마당에서 서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김상헌이 마루 위로 올라서 방으로 들어가면 최명길은 다시 아궁이의 재를 긁어냈다.
격서
pg 229
- 말해라. 다녀오겠느냐?
서날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렝서 하라시니, 천한 백성이 어쩌겠습니까.
'나라'라는 말이 천 근의 무게로 김상헌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녀오너라. 다녀오면 전하께 아뢰어 우선 종구품 참봉을 제수하고, 환궁 후에는 정칠품 참군으로 올려서 어영청에...... 터져나오련느 말을 김상헌은 겨우 눌러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김상헌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상헌은 다급했다.
pg 232
김상헌의 목젖이 뜨거워졌다. ...날쇠야, 너는 갈 수 있고, 너는 돌아올 수 있다......
김상헌은 서날쇠의 방향과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물어야 하는 수치심을 견디기 어려웠다.
냉이
pg 270
김상헌이 말했다.
-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적이 성을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주소서.
임금이 김류를 바라보았다. 김류는 감았던 눈을 뜨면서 임금의 시선을 받았다. 임금의 시선은 말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류가 말했다.
- 칸이 왔다면 어쨌거나 성이 열릴 날이 가까이 온 것이옵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 날짜가 다가옴을 아뢴 것이옵니다.
임금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 영상의 말은 나무랄 데가 없구나.
물비늘
pg 280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호아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답서
pg 295
-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pg 296
최명길이 말했다.
- 전하, 삼백 년 종사가 선비를 길러 왔으니 어찌 상헌만을 문장이라 하겠나이까. 부디 상헌의 아름다움을 지켜주소서. 먼 후세에 상헌의 우뚝한 이름이 남한산성을 빛내게 해주소서.
김상헌이 이마로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울음이 끊어지는 사이사이에 김상헌을 말했다.
- 전하, 명길은 지금 어전에서 신을 조롱하는 것이옵니다. 신이 홀로 면해서 홀로 우뚝하자는 것이 아니옵고, 전하께서 살고자 하시는 뜻에 미력을 보태려는 것이옵니다. 적이 말했듯이 삶은 거저 누릴 수가 없는 것이오니, 살고자 하는 뜻을 더욱 굳건히 하옵소서.
pg 312
pg 344
흙냄새
pg 356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세자가 따랐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에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성 안의 봄
pg 363
백성들이 날마다 몇 명씩 성 안으로 돌아왔다. 봄농사를 시작하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 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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