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서평]일곱해의 마지막_시인 백석의 삶의 한 자락을 상상하다

by 쭈야해피 2020. 11. 5.
728x90
반응형

아껴둔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 히히히히히

지난번에 오디오클립으로 소개한 적이 있었던 김연수 작가님의 신작소설! 일곱해의 마지막을 종이책으로 다시 읽었어요.

역시, 아직 저는 종이책이 너무 너무 좋으네요~

 

https://hearthouse.tistory.com/m/577 오디오클립 김연수 작가의 신작소설을 목소리로 만나다

 

 

30년간 시를 쓰지 않은 백석 시인의 어느 시점, 그러니까 그 옛날에는 40대 중후반이 되면 노년이 되었다고 하니, 노년의 길목에 들어선 시인의 이야기. 어느날 숙청 당해 노동자의 삶을 살야만 했던 시인의 삶을 상상으로 써 본 이야기입니다. 자료는 제한적이었을 테고, (우리는 북한에 갈 수 없으니까요) 해방 이후로의 행적에 대한 그리고 그 마지막 시 이후로는 출간된 시도 소설도 글도 찾을 수 없었을텐데.. 상상의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요? 

 

이 책의 헤드카피는

그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저는 서정적인 문장을 쓰는 김연수 작가님의 이야기와 문체를 엄청 좋아합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로 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이었다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늘 읽고 있었거든요. 오? 그래?? 그럼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 전에 쓴 것들인가? 우와아아아.... 했답니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_깊은 이야기, 아직은 닿을 수 없는 https://hearthouse.tistory.com/m/333

 

 백석 시인의 본명은 백기행. '기행은 시인이다'로 소개하며 3인칭 시점으로 1957년 1958년 그리고 1963년의 여름까지. 그의 일곱해의 ... 이야기라도 숨어 보고 싶은 독자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책장을 들추자마자 금새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마 두번째 읽었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1996년까지 살아계셨다고 해요. 글을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던 글쟁이의 삶은 어땠을까요? ...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간절했을 ... 독재는 창작자들에게는 감옥이나 무덤보다 더한 고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러시아 글과 문학을 번역하며 간신히 살아가던 기행이, 끝내는 고향도 아닌 어느 협동조합으로 보내져 양과 염소를 키우는 낙농업 노동자로 살아야만 했던 이야기. 아마도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한 번도 상상의 'ㅅ'자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쓴 '글들과 문장들'이, 꿈에도 잊을 수 없던 '한 단어와 한 단어들'이, 그 단어들의 사이 사이는 죽지 않고 살아서, 어딘가에서 전해지고, 읽혀지고 숨쉴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희미한 희망'을 품었을 것이기에.. 그 긴 세월을 살아내셨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김연수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면서,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늘어났습니다.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M&sc.mreviewTp=1207&sc.mreviewNo=90089&Dnews 

 

 

 

pg. 20

기행은 말문이 막혔다.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니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엄종석은 그런 그를 비웃듯이 바라봤다. "아직도 순수문학의 잔재가 남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지 못하니 안타깝소.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프리카의 리니이라면 거기다가 붉은 깃발을 달든 푸른 깃발을 달든 무슨 상관이오. 우리의 동물이어야 붉은 깃발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 ..."

 

pg. 53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 쓴다는 것. 그러자면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는데, 기행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아'가 너무 많았다. 그 자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pg. 64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면, 한때 감리교회가 서 있던 남산재 빈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희망과 꿈을 버리고, 또 '나'를 버리면, 죽음과도 같은 이 깊은 골짜기를 지나 저 언덕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인지.  

 

pg. 69

다시 상허가 "바쁘지 않으면 내 이야기 좀 들어보겠나?"라고 말했다. 기행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시에는 그와 만나기만 해도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마치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여기듯이.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그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신발 위에 내려 쌓였다. 그는 그 거리에서 곧 지워질 것처럼 보였다.

 

pg. 85

해와 달의 이야기를 할 때, 상허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표정이 사라졌다. 기행은 그 무표정이 반가웠다. 잘 모를 때는 그 무표정이 까끈한 성격에서 기인한다고 여겼으나 상허가 조금 이상해지고 난 뒤부터는 그게 얼마나 인간적인 표정인지를 기행은 알게 됐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복선. 1957년과 1958년 사이. 기행의 움츠러든 어깨와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가 보이는 거 같았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친구 문인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고 문학을 논했던 그들이. 이제는 대화도 나누기 힘든 그들이 되었고, 전염병에 걸릴까... 함께 숙청될까 두려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시절. 어쩌면 차라리 협동조합에서의 삶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pg. 140

"옳거니, 그럼 지!"

"지로 말할 것 같으면 짠지, 의지, 젓국지, 섞박지, 나박지, 무짠지, 배추짠지요, 이로 말할 것 같으면 동치미, 깍두기, 외깍두기, 숙깍두기, 닭깍두기, 굴깍두기, 배추통깍두기요, 치로 말할 것 같으면 통김치, 쌈김치, 풋김치, 장김치, 갓김치, 파김치, 박김치, 외김치, 채김치, 굴김치, 닭김치, 나박김치, 열무김치, 짠무김치, 달래김차, 지레김치, 점북김치, 겨자김치, 외소김치, 생선김치, 미나리김치, 돌나무김치, 곤쟁이젓김치인데......"

"아무래도 치 자로 끝나는 게 가장 많겠구먼."

"그렇지요. 하지만 치 자에도 좋은 치가 있고, 나쁜 치가 있단 말씀이에요." ...

"풋나물은 무치고, 짓는 밥은 재치고, 바느질은 감치고, 빨래할 건 디치고, 돼지 치고 닭치고 외양간엔 소치고, ......"

 

pg. 159

"아니, 그 아이는 왜 소설가하고 시인한테만 선생님이라고 했답니까? 저한테는 꼬박꼬박 동무라고 대꾸하더니만." "그것도 몰라?"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됐어. 알아서 좋을 거 없어." 그러면서 병도는 중얼거렸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소설가 되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만, 그렇게 죽을 팔자여서 그랬나부지, 라고.

 

pg. 172

왜 그래야만 했는지 묻는 기행에게 이천육백 년 전의 시인이 대답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무쇠 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시대에 좌절할지언정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라고.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pg. 185

그리고 1937년 4월의 어느 날,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 생활을 하던 기행을 대신해 그 처녀의 집안을 설득하러 나섰던 그 친구가 통영에서 그녀와 결혼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 순간, 기행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졌고,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에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pg. 198

"정말 시인 백석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아니오,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됩니다." 그는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보니 역 앞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건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리는'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이라면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고 있을 게 분명했다.

 

pg. 207

마찬가지로 그 왼쪽으로 글자들이 쭉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보이는 대로 받아 적었다. 다 적고 나니 마음에 흡족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었다.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쓴 그 시도 포르르 타오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pg. 217

나는 이 부산 가까운 남해의 한 조그만 도시를 잊을 수 없다. 그 맑은 하늘, 초록빛 바다의 선연한 아름다움도 그 한 가지 모국어이면서도 반쯤밖에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도 그리고 그 옛 왜적과의 싸움터였다는 뒷산에 올라 바라보던 쟁반 같은 대보름달도......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이 바닷가의 소도시를 고향으로 가진 한 친근한 벗을 잊지 못한다.

 

pg. 235

그쯤에서 기행은 더이상 병도의 편지를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대신, 그 밤 상허에게 들은 말들과 항공우편 봉투 속에 넣어 벨라에게 보내던 시들을 생각했다. 결국 아무런 구원이 되지 못한, 그 연약하고 순수한 말들을.

포르르 타오르다 사그라들지 않고,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었을... 그 연약하고 순수한 말들을 떠올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