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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talking book & contents)

우리의 회색빛 현실_상냥한 폭력의 시대

by 쭈야해피 201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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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좋은사람>을 읽은 이후에 오랜만에 만난 정이현 작가의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니... 타이틀과 작가의 이름만으로 바로 선택하게된 책이다. 

정이현 작가의 소설은 대개 도시 속 이야기와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 삶의 이질감 등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발랄, 적날하게 드러내곤 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더 각박하게 변해 갔고, 한 해 한 해 쌓이고 누락된 이야기들 속에 감정은 신랄하게 드러내다 못해 이제는 무뎌진것 마냥 건조해졌다. 도시 속 젊은 여성들은 아파트 숲 속에 가정을 꾸린채 일상을 살아내는 1인이 되었다. 나도 그리고 이웃도, 세상도 같은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달에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읽었는데, 그때는 극적인 상황설정이긴 했으나 무언가 희망을 담은? 혹은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어 책을 읽고 나서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집은, 한 편 한 편 읽고 나서, 허무감과 공허감이 남아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어쩌면 너무 현실적이라서 소설 속 주인공과 나의 상황을 결부시킬 수 밖에 없어서 그랬을 것이리라. '서랍속의 집'에서는 전세집을 전전하다 대출을 끼고 집을 구하는 진의 기분이 커다란 도미노 게임 속 도미노 칩이 되어 떠밀리고 떠밀려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표현되었다. 그런 진의 기분은 전세집을 구하기 위해 전전하는 나의 상황과 오버랩 되어 더 없이 가라앉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담하게 감정의 기복이 없이 풀어낸 이야기는 이 현실을 또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연민도 자만도 기만도 아닌 이성적 판단으로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자각하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면 불평 불만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하라고... 


상냥한 폭력의 시대... 말 그대로 폭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냥이라는 얼굴이 폭력을 자행하는데 더없이 좋은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시대. 무서운 얼굴이 아닌 무미건조한 얼굴의 폭력.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대한민국은 회색빛 친절한 가짜의 얼굴로 파괴를 일삼고 있다. (표나지 않게 깔끔하게. 폭력을 행하는 그들의 기준으로)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묵시하고 그대로 두든 고개를 돌려 제대로 된 빛을 찾든, 도미노칩에 불과한 한낱 1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냉정하게 무겁게 힘을 휘두르고 있다. 


'우리 안의 천사' 중에서

72 pg

 남우는 선배와, 나는 전 직장의 동료와 함께 방을 얻어 살았는데 우리는 각자의 룸메이트가 없는 시간을 틈타 서로의 방을 찾곤 했다.  ... ... 마침, 내 룸메이트가 결혼하고 남우의 룸메이트가 외국에 가게 되는 시기가 비슷하게 겹치자 우리는 각각 새 동거인을 구하는 대신 서로의 동거인이 되기로 결정했다. 



'서랍 속의 집' 중에서

179 pg

 그런데 이 집은 왜 나가는 거래요?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유원이 금 실장에게 물었다. 

 아, 주인이 전세금 올리거나 반전세로 전환하자고 하니까 부담됐나 봐요. 애가 쌍둥이니 더하지 뭐. 친정인지 시댁인지에 들어간다더라고요.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 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금 실장이 이 집의 정확한 가격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안나' 중에서

215 pg

 안나가 시원하게 웃었다. 씩씩한 웃음이었다. 사람을 믿는 것 같았다. 경은 집에 오는 길에 스마트폰으로, 아이의 유치원 이름과 보조 교사 모집이라는 문구를 함께 넣어 검색해 보았다. 구인구직 사이트의 웹 페이지가 떴다. 주 5일 근무, 시급 7천 원, 4대 보험 불가. 안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언니 감사합니다. 맛있는 밥도 사주시고 제 얘기도 들어주시고. 또 뵈어요.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원망하기 위해서, 욕망하기 위해서, 털어놓기 위해서. 


아직은 무미건조한 삶에 종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내 기준이다. 사람마다 다른 삶을 선택하고 그에 책임을 지든지 물 흐르는 대로 그냥저냥 살든지 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산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들의 삶이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내 주위 사람들의 삶이라 100분 체감을 하지 못한채 막연히 부러워하는 삶이지만, 아직은 선택하지 못한 이야기이다. 


8년 후,,, 40대 중반이 되어 아기엄마가 되었을 때는 또 다른 가치관으로 이 이야기들을 바라 보게 되겠지. 한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8년 후 15년 후 20년 후에는 상냥한 폭력보다, 씩씩한 웃음을 웃는 시대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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