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요즘 가장 속상한 일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짓말을 숨 쉬듯 하는 전 대통령의 행태를 지켜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속상한 일이라고 한다면,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하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기쁘고 기쁘고 기쁜 일이 무참히 짓밟혀 버린 것이다. 얼마나 축하할 일인데, 두고두고 1년 내내 기뻐하고 좋아할 일인데, 그렇게 소설 속 이야기를 2024년에 현실로 마주하게 만들다니..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서야 구매를 했지만, 꼭 읽고 싶었던 책이기도 했다. 사실은 우울하지 않을 때, 삶이 버겁지 않을 때 읽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지난가을에 구매하고도 이제야 마침내 다 읽었고, 읽고 나서도 2주 후에야 독서감상문을 쓴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울어서, 눈꺼풀이 퉁퉁부어서 읽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후기를 남긴 바 있다.
>>> https://hearthouse.tistory.com/531
소년이 온다_ 모두가 꼭 읽어야할 책
책을 한장 한장 넘기기가 어려웠다. 힘들었고, 넘기려니 너무 두려웠다.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계속 나와서 미루고 싶었다. 마지막 섹션 두 곳에서는 이미 포기한 퉁퉁부은 눈두덩이와 흘러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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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는 초반에 그러니까 인선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계속 눈물이 났다. 오히려 뒤로 넘어가서는 한두 번 정도 울었고, 견딜만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서 너무 충격적이었고 또 죄송했지만, 고등학생 때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으면서 분노했던 어떤 지점들과 맞닿아있어서 울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작가님의 표현 방식 때문일 수도 있다. 밤마다 밀려오던 그 소년들 대신에, 친구의 시선으로 또 그 가족들의 시선으로 또 그들을 인터뷰해 놓았던 기사와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채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슬프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슬펐고 분노했고 심장이 서늘해졌지만... 눈꺼풀이 퉁퉁 붓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나에게는...
pg. 51
문제가 있는 인터뷰이를 만나거나 섭외된 장소에 말썽이 생겨 내가 허둥거리면 동갑내기 인선은 그렇게 선선히 말하곤 했다.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내가 문제를 해결하든, 절반 정도만 해결하든, 마침내 실패하고 돌아오든 그녀는 장비들을 세팅하고, 현장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놓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 영상을 녹화해야 할 경우에는 캠코더를 고정시켜 놓고, 스틸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서 웃으며 말했다.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나는 이 문장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나의 일은 인터뷰와 섭외가 주 업무이니까. 현장에서는 언제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니까.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 인선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는 든든한 동료가 있다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
pg. 84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 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pg. 192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pg. 212
그가 만약 십대였다면 출생 연도가 엄마와 얼추 비슷할 것 같았어. 두 사람의 그 후에 대해 다루면 되겠다는 계획이 섰어. 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에 대해서.
pg. 220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pg. 230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 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고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그래 사실대로 대답을 했져. 아이들이 이서나긴 했다곡. 심장이 벌어질 것추룩 뛰멍 말이 더듬더듬 나와신디, 정작 그 사름은 도근하게 한참 가만히 있당 또 물어봐서. 혹시 갓난아기 울음소리도 들었느냐곡.
pg. 232
금방 아이들이 학교서 돌아올 건디 어서 가줘시민 해서. 우리 서방이 알민 난리가 날 건디 제발 그전에. 도로 부엌으로 들어강 물그릇을 내려놓곡, 멫 번 오목가심을 문지르당 나왕보난 그 사름이 안 보여서. 아무 흔적도 어신 댓돌에 내가 앉앙 시퍼런 바당을 내당봐서. 꼭 그 사름 발소리가 다시 들릴 것 같아신디, 그걸 내가 기들리는 것인지 겁내는 것인지 알 수가 어섰주게.
pg. 297
씨를 말릴 빨갱이 새키들, 깨끗이 청소하갔어. 죽여서 박멸하갔어. 한 방울이라도 빨간 물 든 쥐새키들은.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고 했어.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려넣었다고 했어.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 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고 했어.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
그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엄마는 맥락 없이 자책했어.
그때 내가 무사 오빠신디 머리가 이상하다고 해실카? 무사 그런 말밖에 못해실카?
pg. 311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g. 317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한강 작가님은 이 소설은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유족들은 알 것이다. 그리고 입을 떼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던 사람들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세월도. 그 지극한 사랑이 고통이라고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 고통이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고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 그 맥을 관통하는 무언가, 있다. 소설을 다 읽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막연했다. 막연하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실타래의 끝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로써 다음에 읽고 싶어진 책도 정해졌다. 김누리 교수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읽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하고 들려주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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